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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yellowruby Jun 11. 2024

누군가의 손을 기다리는 자에게도, 손을 내미는 자에게도

뮤지컬 디어에반핸슨

2024년 5월 18일 토 충무아트센터
박강현, 김선영, 임지섭, 홍선영 배우 캐스트


Dear Evan Hansen

안녕 디어 에반 핸슨? 오늘은 멋진 날이 될 거야

극을 여는 첫 대사이다.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대성공한 뮤지컬들에 대한 애정이 크지 않다. 미국 특유의 문화를 표현하고 녹여낸 극의 요소들이 한국 배우들과 연출들이 표현하는 데 있어 묘한 이질감을 주기 때문 (배우들의 연기가 좀 더 bluffing 되는 기분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색한 부분은 한국어로 번역된 결과가 굉장히 아쉽다는 점이다. 그래서일까 한국 뮤지컬 혹은 한국 기획사들의 오리지널 공연은 스토리가 뻔하고 막장이어도 이질감 없이 공연을 관람할 수 있고, 넘버도 3n년간 한국인으로 살아온 나의 K감성을 잘 자극시켜주기 때문에 미국 브로드웨이 원작의 뮤지컬보다 잘 흡수할 수 있다(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많이 아는 대극장의 멋진 포스를 뽐내는 뮤지컬 넘버들은 프랭클 와일드혼 작곡가의 작품이 많다. 그 넘버들은 너무 좋은데…! K-감성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어 에반 핸슨은 내가 먼저 OST를 찾아 들은 작품이다. 쇼츠로 흘려 들은 넘버에 나도 모르게 이끌려 벤 플랫의 OST로 처음 듣게 됐었는데, 대부분의 넘버가 맘에 들었던 기억이 있다. 가사가 잘 들리지 않아도 멜로디로서 감동을 받는 음악들이 있지 않은가. 뮤지컬 내용도 모르고 가사도 완벽히 들리지 않았지만, 음악을 듣던 와중에 하던 일을 멈추고 곡에만 집중해야 하는 시간이 꽤 있었다. 게다가 그 이후에 시츠프로브의 You’ll be found 쇼츠를 봤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한창 힘들 때여서 그랬을까, 배우 한 분 한 분이 음을 쌓아 올리고 감정을 쌓아 올려서 노래가 된 위로를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을 참기 위해 코를 찡긋하고 있었고, 나는 그때 잠깐동안 스친 감정을 더욱 깊고 길게 느끼고 싶어서 공연장까지 가야 하는 귀찮음을 이겨낼 적당한 설렘을 가질 수 있었다.


무대에서 주는 감동, 충무아트센터

충무는 아이러니하게도 좋은데 싫고, 싫은데 좋다. 아니다, 다시 말하면 극을 관람할 때만 좋고 그 이외의 조건에서는 모두가 별로다. 위치도 주변 상권도 주차나 교통도 심지어 로비도 너무 좁아서 캐스팅 보드를 찍거나 MD를 살 때 복잡함이 다른 곳의 두 배다. 하지만, 극이 시작되면 ‘역시 충무는 충무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충무에서 공연했던 극들을 생각해 보면 무대를 참 잘 쓴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곳보다 면적이 적어 제한된 공간을 사용해야만 해서인지 레이저/스크린으로 레이어드 된 무대 연출에 대해 매번 감탄하게 된다. 거기에 또랑또랑하게 들리는 배우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도착하기 전까지의 귀찮음을 잊게 된다.


이번에는 특히 무대 연출에 감탄을 하면서 처음으로 중블에 앉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공연이었다. 주인공 에반이 무대에서 하는 독백씬도 많고 에반의 감정과 생각의 축적이 레이어드 된 공간 연출로 나타내주고 있어서, 무대의 중앙에 있다면 주인공들의 감정에 온전히 공감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도 생겼기 때문에. 어쩌면 주인공에 좀 더 동화될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만들어진 상처를 굳히고 메마를 때까지

늘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나의 ‘업’이다. 나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그 일에 대해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이라서 그런 것인지, 정말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가장 아픈 부분이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늘 내 인생에서 가장 아픈 부분이어서, 들춰지기만 해도 씁쓸하기 때문에 깊이 숨겨두고 감추는 부분이다.


나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한다. 그저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습관이 되어 살아가기 때문에, 모든 일에 있어서 크나큰 실패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에서 본인의 일을 사랑해서 하는 사람들 특히 동경하는 음악 분야에서 작은 숨까지 탈진하며 토해내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움과 경이로움을 가지게 되고, 마음 한 켠에서는 부러움이 쓰디쓴 맛으로 올라오곤 한다. 매번 뮤지컬은 나의 그런 감정을 자극했고, 좋아하는 분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피하고 싶은 경험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뮤지컬이나 공연 예술을 관람을 하는 이유가 뭐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히려 아픈 상처를 정확히 들춰볼 수 있고 소독해 가는 동시에, 아픔을 회피하는 방식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무대에서 공연하는 아티스트들에게 온전히 몰입하지 않고 스토리에 잠식되지 않으면서 제삼자의 시선으로 이것저것 관찰하고 분석하다 보면(이건 MBTI 특성이라고 최근부터 믿고 있었다!) ‘아, 공연계는 나에겐 맞지 않는 길이었을거야’라는 결론으로 귀결하게 된다. 어느 공연을 보더라도 이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은 없었고, 이제는 나의 상처가 딱지가 되어 아픔보다는 간지러움이 남은 상태가 되었다.


누군가에게 온전히 공감하고, 손을 내밀 수 있다는 것


공감과 연민은 우리를 더 큰 ’나‘로 만든다 -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류시화


류시화 시인의 산문집에서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머리가 띵해졌던 기억이 있다. 흔히 말하는 MBTI를 핑계로, 아니 어쩌면 나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 기제로 나 이외의 모든 사람들을 타인으로 규정하고 살아온 나였다. 당연히, 남들에게 큰 관심이 없고 진심 어린 공감과 연민은 하지 않았다. 이는 예술 작품 속의 가상의 인물에게도 역시나 적용되었다. 나는 이제까지 이런 생각과 행동이 나를 작은 ’나‘로 만들고 있는 행위임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고, 마음이 좁아져가는 나의 모습에 의문을 가질 뿐이었다. 류시화 시인의 이 글귀를 다이어리에 적어놓은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였고, 나는 디어 에반 핸슨의 에반 핸슨을 만나게 되었다. 극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동기는 순수하지 못했을지라도, 타인에 먼저 손을 내밀수 있고 그 순간 온전한 공감을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중요하고 거대한 일이라는 것을 전달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까지 그 누구에게 온전히 공감해 주었는가? 진심 어린 손을 먼저 내밀 수 있는, 아니 내밀어본 적 있는 사람이었는가? 손을 먼저 내미는 것이 나비효과가 되어 세상을 얼마큼 따뜻하게 만들 수 있는지, 또 그 따뜻함은 결국 세상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만유인력이 될 수 있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것. 어렵지만 어쩌면 좁아져버린 내 마음을 확장시키고 세상을 환대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You’ll be found

누군가의 손을 기다리는 자에게도, 손을 내미는 자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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