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렁하게 지냅니다

by 더여린

검은 충격이 나에게 나쁜 것만 가져다준 건 아니다. 죽음으로부터 벌거벗겨졌고 삶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죽음을 경험한 영혼은 더는 무서울 게 없는 텅 빈 비닐봉지와 닮았다. 헐렁헐렁 어디로든 바람 따라 날아다니는 텅 빈 비닐봉지. 텅 비어 있기에 잘 담을 준비가 되어있는 유연한 비닐봉지.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삶에서의 ‘순간’만이 매우 강렬한 것임을 알아차린다. ‘순간’만이 ‘전부’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순간을 살면 용기의 힘은 강해지며 점점 더 위로 치솟는다. 마치 한여름의 불꽃놀이처럼. 목적 없이도, 힘을 빼고도, 위로 타오른다. 사람들은 흔히 죽을힘을 다해 살라고 하지만, 죽음에는 아무런 힘이 필요 없기에 그저 순간을 살다 죽을 거처럼 살라고 하는 쪽이 더 맞는 말임을 안다.


매일 느지막이 일어나 커피 한 잔과 빵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며 그림이나 그리는 나에게 참 팔자 좋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 어떤 면에선 난 참 팔자가 좋다. 하지만 이런 나의 팔자는 내가 나의 죽은 영혼과 맞바꾼 것이라 믿는다. 죽음은 나에게 순간을 강렬하게 그리고 헐렁하게 보내라고 알려줬다.


하지만 순간을 강렬하면서도 헐렁하게 보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아무리 어렵게 얻어낸 진실이라 해도, 의식하지 않으면 금세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죽음에게서 절절히 깨달았다 할지라도 실천하려 애쓰지 않으면, 사람들의 속도와 방향에 곧 휩쓸려 버리고 만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헐렁하게 지내기 위해 정신을 더 또렷하고 맑게 세운다. 그리고 매일 아침 하루의 방향을 고요히 정한다. 하루 가운데 가장 강렬하면서도 헐렁한 순간을 꼽자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시간이다. 나와 그림, 나와 글, 단둘이 남는 그 공간은 여유로운 불꽃으로 가득 차 있다. 조용히 타오르며 나를 다시 나에게로 되돌려 놓는 시간. 나는 이 시간을 놓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한다. 아무튼, 오늘도 헐렁하게 지내는 데에 성공했다.


자연처럼 행복과 불안을 함께 취한다. 그러므로 나의 생은 자연스럽다. 자유롭다. 또한 나는 믿는다. 자연스럽고 자유로워 조금은 낯선 삶의 기록이 언젠가 반드시 누군가에게 닿을 거라는 걸. 느리게, 천천히 시간이 흐르며 나의 기록들은 두둥실 떠오를 것이다. 풍선처럼 하늘로 올라가 끝과 맞닿은 뒤, 팡하고 터져 더 많은 조각을 남길 것이다. 이 기록은 그 조각의 시작이다.


가볍게, 가볍게, 아주 가볍게 언덕을 오르내리고 싶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