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

두 번째 신화

by 사아



점심 먹고 복도 구석 낡은 소파 모서리에 기댔어. 창문에 붙은 반투명 시트지가 찢긴 틈으로 빛이 들어왔지. 전보다 높아진 각도로. 책은 쥐고 있었는데, 눈은 미끄러졌어. 누군가를 의식하기 시작했거든. 멘토, 그루.
멘토들은 뭉쳐서 핸드폰을 보거나 잡담을 했어. 그루는 달랐지. 책을 보거나 노트에 뭘 끄적였거든. 우리를 볼 때도 있었어. 감시하는 눈은 아니었고. 가끔 내 쪽을 볼 때가 있었지. 눈이 마주쳐도 피하지 않더라. 그게 좀 거슬렸어.
나보다 세 살 많았어. 눈 밑은 늘 어두웠지. 철학과를 나왔대. 그래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가 싶었어.
“무슨 책 읽어요?”
고개를 들었어. 그루가 서 있었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고. 책 표지를 들어 보였어.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예전에 사둔 건데요. 솔직히 뭔 소린지 잘 모르겠네요.”
그루가 표지를 보더니 웃었어.
“그럴 때 있죠.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책에 기대고 싶은 날.”
나는 어깨를 한번 들썩이고 책을 덮었어. 내게 필요한 건 기댈 곳이 아니라 출구였으니까.
제대로 말을 튼 건 그날이 처음이었어.
“여기서 보통 얼마 만에 나가요?”
“빨리 나간 사람도 있고, 오래 묶인 사람도 있어요. 근데 사아 씨는 아마 여기서 바로 끝나진 않을 거예요. 사단 관할이잖아요. 군단 쪽도 한 번 더 거칠 거예요.”
사실이었어. 소대장이 했던 말이. 나도 모르게 어금니가 물렸지. 책을 다시 폈어. 금방 덮었고. 활자가 번졌거든. 내가 다시 입을 열었어.
“한때는요.”
그루가 옆에 앉았어.
“모든 일에 이유가 있다는 말, 믿었어요.”
마른침을 삼키고 이었어.
“엄마가 쓰러지고 나니까 알겠더라고요. 그 말은 고통 근처에도 안 가 본 새끼들이 하는 소리예요. 사연 없는 사람 없다면서, 다 각자 힘들다며 통달한 척 훈수 두는 새끼들… 입 찢어 놓고 싶어요.”
그루는 말이 없었어. 안경 알을 옷으로 닦았지.
“남들처럼 평범하게 구르다, 휴가 나오면 엄마 밥 먹고, 친구들이랑 술이나 한잔하다 복귀할 줄 알았어요. 왜 하필… 나죠.”
두 손으로 눈을 비볐어. 그루가 낮게 불렀지.
“제가 보기엔…… 사아 씨가 그런 부류인 것 같아요.”
안 들어도 알겠더라. 뻔한 위로. 그루는 잠깐 말을 골랐어.
“저는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불러요.”
웃어야 할지, 때려야 할지 몰랐어.

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