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애들 키울 때 직장을 다녔으니 집에서 꼬깃꼬깃한 옷을 입은 채로 아이 유치원 차를 기다려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보다 젊은 엄마들의 그런 심정을 몰랐지만 같은 여자로서 어떤 마음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옷가게를 하면서 나보다 젊은 엄마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아! 이런 옷도 있어야 하는구나.’
힌트를 얻기도 했다. 외출복보다는 가볍게 입기 편한 옷. 아이들과 함께 활동하기가 편해야 했다.
결혼하기 전 직장생활을 할 때 젊은 아기 엄마들을 보면서 '나는 저런 아줌마는 안 되어야지'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도대체 '저런 아줌마'는 어떤 사람 이란 말인가? 내 사전에 '아줌마'라는 단어는 없을 줄 알았던 자만심 많은 아가씨였나 보다. 아기 업고 다니는 새댁들의 초라한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절대로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라는 철없는 생각을 했다. 이것은 내가 30대에 내 나이 50은 없을 것 같았고 갱년기라는 단어는 나와 상관없는 단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경우일 것이다. 나는 마냥 이 모습 이대로 남을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살았다.
30년 전이니까 그때 젊은 엄마들은 대부분이 아기를 포대기에 업고 다녔다. 옷이며 스타일이며 아무것도 의미가 없었다. 포대기를 풀어보면 엄마 옷에는 우유 찌꺼기가 묻어 있기도 하고 아기가 흘린 침이 묻어서 얼룩이 생겨있기가 예사였다. 그리고 옷은 구겨져있고 목은 늘어나 있는 것이다. 아기들은 왜들 그렇게 엄마의 옷을 잡아당기는지 목이 축 늘어나는 것이다. 아기가 흘린 우유나 침 등으로 엄마옷에서는 늘 특유의 아기 젖 냄새가 나기도 했다. 그래서 하루에 몇 번을 갈아입어야 할 때도 있다. 아무리 좋은 옷을 입는다 해도 자주 빨아 입다 보면 옷은 금세 낡은 옷이 된다. 이런 아기 엄마들은 나이가 나보다 적게는 두세 살, 많아봤자 대여섯 살 많은 새댁이었다. 이렇게 새댁인 아기 엄마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저런 아줌마가 안 되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다. 가뜩이나 옷을 좋아하는 나는 포대기로 다 가리더라도 예쁜 옷을 입는 것은 포기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결혼을 하고 나도 아기 엄마가 되었다. 나도 역시 내 아이들을 업어서 키웠다.
‘아기 띠’라는 것이 있는데 포대기보다는 엄마들의 스타일이 그나마 덜 망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아기띠는 불편하고 힘들어서 거의 포대기로 업고 다녔다. 가까운 곳은 유모차를 태우고 다니기도 했지만, 아기들은 내 등에 업혔을 때 제일 안정감이 있고 편안해했다. '나는 저런 아줌마는 안 되어야지' 했지만 나 역시 영락없는 아줌마가 되어갔다. 하지만 모든 것은 아기가 먼저였다. 내 몸에서도 아기 젖 냄새가 날 수밖에 없으며 천으로 된 기저귀 가방을 들고 다녀야 했다. 머리 또한 아기를 업었을 때 아기 얼굴에 스치지 않도록 짧게 잘랐다. 가끔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등에 업힌 아기 얼굴을 머리카락으로 자꾸 스치는 엄마들을 보면 화가 나기도 했다. 말 못 하는 아기는 엄마 머리카락 때문에 눈이 찔리는지 눈도 잘 못 뜨기도 했다. 얼굴을 간지럽히니 고개를 젖히기도 하고 손으로 얼굴을 막 문지르기도 한다. 아기를 업을 때는 머리도 묶어야 했고 그게 귀찮아서 큰아이 백일이 되기 전에 등까지 내려오던 긴 머리를 솟커트로 잘랐다. 그리고 그 이후 30년이 지나도록 한 번 자른 머리를 더 이상 머리를 기를 수가 없었다. 아기 엄마들에게 패션이나 스타일은 말할 것이 없었다.
큰아이 백일쯤 되었을 때 제대로 입을 옷이 없었다. 임신 중에 입었던 옷이었고 임신 전에 입었던 옷들은 출산 후 살이 안 빠져서 맞는 옷이 없었다. 그리고 임신 전에 입었던 옷들은 아기를 키우면서 입을 만한 옷이 아니었다. 옷 좋아하던 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기 때문에 쇼핑을 하러 갈 수도 없었지만 동네에 요즘처럼 이렇게 작은 옷가게도 없었다. 아이를 업고 백화점을 가더라도 옷을 제대로 입어보고 살 수가 없었으며 직원들은 아이를 업고 오거나 유모차를 끌고 오는 새댁을 반길 리가 없다. 썩 좋은 고객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기 때문에 선택의 폭도 좁아서 옷 고르기가 힘들었다. 나는 이미 이런 과정을 겪은 후라서 옷가게에 새댁들이 왔을 때 누구보다 그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기 엄마들에게 어떤 옷이 필요한지도 잘 알 수 있었다. 내가 아기를 키우던 젊은 엄마였을 때 입고 싶었던 스타일이 있었지만 찾기가 쉽지 않았다. 막상 사 와도 잘 입어지지 않고 불편했던 옷들이 많았다. 오래전이지만 나도 새댁이었던 시절이 있었기에 이런 경험들이 나보다 젊고 아직 어린 엄마들에게 도움을 줄 수가 있었다.
주부인 손님들은 오가며 잠시 들르는 참새방앗간 같은 동네 '옷가게'에서 작은 행복을 느끼고 싶어 했다.
유일한 낙이 오며 가며 우리 옷가게를 들르는 일이었을 것이다.
옷을 살 때 되도록 좀 질 긴 옷을 사고 싶기도 하다. 아기들이 잡아당기면 금세 늘어나고 잦은 세탁에 원단이 후 줄 해지기 때문이다. 매일 아이와 부대끼고 안아야 하고 업기도 하니까 원단도 좋아야 했다. 아기가 엄마에게 안겨 얼굴을 부비기도 하는데 부드러운 면소재가 아니면 안 된다. 이런 엄마들에게 딱 필요한 옷.
가격이 싸면서 편하게 막 입을 수 있는 티셔츠들이 참 많이 필요한 시기였다. 알다시피 좋은데 저렴한 물건은 잘 없다. 내가 노력해야 했던 것은 원단이 좋은데 몸값 착한 옷을 고르는 일이었다.
업고 다니던 아기들이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하면 엄마들은 옷에 더 신경이 쓰인다. 아이들이 어딘가로 가고 나면 아기띠나 포대기에서 해방된 여자인 엄마들은 몇 년 동안 예쁜 옷을 입어보지 못한 욕구가 살아난다. 가게에 와보면 입고 싶은 것이 많다. 하지만 아이들 밑으로 지출이 많다 보니 늘 지갑은 얇다. 사고 싶은 것은 너무 비싸거나 아직은 못 입을 것 같은 '그림의 떡' 같은 옷들만 걸려 있다면 우울해질 것 같았다.
'참새방앗간처럼 들렀는데 하나라도 건져 갈 것이 없다면 얼마나 스트레스가 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하나쯤은 몸값이 착하면서 누구나 다 입을 수 있는 아이템을 고르는 것에 신경을 썼다. 빈손으로 돌아갈 때의 기운 빠지고 시큰둥한 모습과는 달리 부담 없는 값을 치르고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가는 행복한 미소를 볼 수도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도 행복해했다. 손님이지만 같은 여자의 심정으로 그 마음을 이해하고 바라보면서 어떤 옷들을 주어야 할지 고민도 하게 되었다. 그 고민하는 과정이 내가 단순히 옷만 파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했을 것 같다. ‘이 정도의 가격으로 참 잘 샀다.’ 이런 생각으로 늘 즐겨 입게 된다면 지불한 옷값에 비해 얻어지는‘행복 지수’는 너무나 큰 것이다. 착한 몸값이면서 나름 후발도 있어서 가성비가 좋은 옷들을 쥐어 주는 일은 나에게도 뿌듯하고 보람 있는 일이었다.
엄마들이 아이 학원 차 기다릴 때, 유치원 버스 태우러 나갈 때 만나게 되는 이웃 엄마들의 옷차림을 보게 되는 일을 이해해야 한다. 그 잠깐 5분이나 10분 그렇게 길에 서서 잠시 이야기 나누는 그때 입고 싶은 옷이 있는 것이다.
외출복은 안 되고 그냥 집에서 입던 옷차림 같은데 차려입지 않았지만, 평상시에 좀 신경 써서 예뻐 보이는 옷을 원하는 것이었다. 이때 엄마가 입은 옷은 아이의 얼굴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잠깐 유치원 선생님과 인사를 나누는 순간이라도 ‘누구 엄마’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무릎이 있는 대로 밀려 나온 바지나 목이 늘어져 있고 앞에는 설거지하다가 물이 묻은 얼룩이 있는 티셔츠를 입은 채로 아이의 친구들 엄마와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선생님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것도내 자존심이며 아이에게는 자신감이기도 한 것이다.
예쁜 엄마, 깔끔한 엄마가 선생님에게 ‘우리 누구 오늘도 잘 부탁합니다.’라고 한마디 해 줄 때
아이는 얼마나 밝고 긍정적으로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도 전업주부인 젊은 엄마들은 아이들의 등원 때나, 하원을 기다리며 옆집 엄마랑 길에 서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