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글쎄요,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가요?”라고 반문하고 싶다. 단순히 단어의 정확한 뜻을 밝히거나, 질문한 이의 저의를 따져 묻겠다는 의도는 아니다. 정말이지 이때다 싶은 마음으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좋은 사람>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아이가 있는 아버지이자,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경석’이라는 인물이 주인공인 것만으로도 선택의 이유는 충분했다. 나의 이야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영화 초반, 경석의 반에서 도난 사건이 일어난다. 모두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적막한 교실, 경석의 단호한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도 하고 잘못도 저지르며 살아. 중요한 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되돌리는 거야. 너희들에게 그 용기만 있다면 몇 번을 실수하고 잘못해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어.”
정황상 ‘세익’이라는 학생이 범인으로 짐작되지만, 경석은 섣불리 추궁하지 않는다. 세익에게 먼저 용기 내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할 기회를 주려는 것이다. 그러나 기대는 보기 좋게 무너지고, 결국 경석은 돈을 잃은 학생을 따로 불러낸다.
“우리 반에서 일어난 일이니 담임인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 이거 받아라. 돈은 내가 잃어버린 것으로 하자.”
도난 사건은 학급 운영에 있어서 가장 곤란한 상황 중의 하나다. 이전에는 가방 검사며 몸수색도 가능했다지만 요즘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그런 강제적인 방법은 효과적이지도 못한데다, 무엇보다 인권 문제 때문에 절대 사용할 수 없다. 사실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발각된 경우가 아니라면 범인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인데, 더 난감한 것은 범인을 찾아도 문제라는 점이다. 낙인으로 인한 교우관계 악화, 따돌림, 학교 부적응 등은 해결이 더욱 어려운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경석의 선택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솔한 판단으로 인한 불필요한 상처를 남기지 않았고, 의심 가는 학생을 포함한 학급 구성원 전체에게 유의미한 훈육의 메시지도 충분히 전달했으므로…. 잘못을 저지른 학생에게 교사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었는지의 여부나 사건의 근본적인 해결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경석은 자애롭고 합리적인 교사로 보였다.
이후 경석은 일대일 면담에서 자신의 소행이 아님을 주장하는 세익에게 백지와 펜 하나를 남기고 돌아선다.
“이건 너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널 지키기 위함이야. 네가 했던 행동과 네가 알고 있는 전부에 대해서 좀 써 줘. 곧 돌아올게.”
전처의 부탁으로 딸아이를 하루 돌봐야 했던 경석은 전처의 집에 들렀다가 딸과 함께 다시 학교로 돌아온다. 그러나 백지 상태 그대로 마치 시위하듯 앉아 있는 세익에게 결국 경석은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고, 세익은 교실을 박차고 나가 버린다. 차에 혼자 남아있던 딸아이가 사라지고 없자, 경석은 놀란 마음으로 인근 거리를 헤매다가, 청천벽력같은 딸의 교통사고 소식을 듣는다. 딸의 실종과 사고가 세익과 연관되어 있을 거라는 추측으로 새삼 세익에 관해 조사를 하던 경석은 그동안 미처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된다. 세익이 학교에서 어느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았다는 것, 본인 스스로 전교생을 따돌리는 셈이라 ‘전교생’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는 것, 친부모 슬하가 아니라 큰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다는 것. 망연히 창밖을 바라보던 경석의 마음을 나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몇 해 전 유난히 지각이 잦던 아이가 있었다. 엄하게 다그치기도 하고, 부드럽게 달래보기도 했으나 결국 그 습관을 고치지 못하고 헤어졌다. 다음 해에 그 아이를 맡은 담임선생님과 연락할 일이 있었는데 다행히도 지각 횟수가 현저히 줄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면서 그 선생님께서 조심스레 물어오는 말이, 아이가 이혼 가정에 부모와도 떨어져 할머니와 살고 있던데, 혹시 알고 있었느냐는 것이었다.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이 영화 속 경석과 매한가지였을까.
왜 나에게는 알리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서운한 생각이 앞섰다. 그러다 문득, 어쩌면 그 아이가 나에게 말해주지 않은 것은 내가 들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식적인 애정과 친절로 포장된 나의 무심함이 아이의 입을 닫게 했는지도 모른다고…. 그저 좋은 교사로 비치고 싶었을 뿐, 진짜 좋은 교사가 되려는 노력은 부족했는지도 모른다고….
“그럴 애 아니야.”라고 말하면서도 자신 없어 하던 경석의 얼굴이 떠오른다. 나는 내가 맡은 아이들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아니, 얼마나 알고 싶은 걸까.
“다 믿어주신다고 했잖아요.”
원망과 슬픔으로 일그러진 세익의 얼굴에 적어도 거짓은 없다. 도난 사건의 진짜 범인은 따로 있었다. 모든 게 장난에서 비롯된 일임을 알게 된 경석은 수업 중인 교실에 들어가 가해 학생의 뺨을 거칠게 때리고 만다. 절제를 잃은 그의 충동적인 행동에 다소 놀랐지만, 그 순간 나는 온전히 경석에게 몰입해 있었다.
장난, 장난, 장난…. 단어가 함의하고 있는 의미 자체에는 잘못이 없다. 언제나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태도가 문제일 뿐. “그냥 장난이었어요.”라고 말하며 자신의 잘못을 손쉽게 합리화하고 타인의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아이를 만날 때면 나는 정말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영화 속 경석처럼 뺨이라도 한 대 시원하게 치고 싶지만, 그런 건 꿈에서나 해볼 뿐이다. 교사로서 학생들을 인격적으로 현명하게 계도하는 길은 너무나 멀고도 험하다.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쓸쓸히 교정을 떠나는 경석을 보며, 그럴 수밖에 없었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이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좋은 교사일 수 없다는 생각에 학교를 떠난 것이겠지만, 그건 좋은 교사이고 싶은 마음이 내재된 선택이기도 하니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나아가 한 사람을 ‘좋다’, ‘나쁘다’라는 말로 평가하는 것 자체에 회의가 들기도 한다. 언제, 누구와, 어떤 면을 공유하느냐에 따라 한 개인은 여러 모습으로 존재할 테니까. 그 입체성과 다층성을 납작하게 뭉뚱그리는 것은 옳은 일일까, 아니 가능한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