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을 옹호합니다
며칠 전 감기 기운을 핑계 삼아 아이가 등원을 거부했다. 자기 때문에 친구들도 감기에 걸릴지 모른다며 난데없이 인간애를 발휘하는 통에 아침부터 웃지 못 할 실랑이가 벌어졌다. 결석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아서 등원을 준비하려는데, 별안간 아이가 내 다리에 매달리더니 간절한 호소의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아뿔싸, 나의 망설임을 간파한 아이는 소파에 누워 뻗대기 작전에 들어갔다. 일찍 데리러 가는 조건으로 다시 설득해보려 애썼지만, 결국 아이 뜻대로 되었다. 어차피 질 싸움이었다.
‘내가 애를 너무 나약하게 키우는 건 아닐까. 아픔을 견디는 경험도 어느 정도는 필요할 것 같은데…. 저러다 습관 되면 어떡하지.’
이런저런 염려는 나의 전반적인 양육방식에 대한 성찰로 이어졌다. 타인의 돌봄에 기대어 살아가는 어린 아이에게, 주 양육자는 그야말로 절대적인 존재가 아닌가. 내가 가진 가치관이나 생활 습관 같은 것이 아이에게 부지불식간 스며들어 삶 전반을 지배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뭔가 아찔해졌다. 나는 매일 아이에게 무엇을 주고 또 무엇을 앗아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무른 부모이기도 하지만, 물러 터진 교사이기도 하다. 담임을 맡을 때면 학급 아이들이 찾아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조퇴시켜 달라고 할 때가 많다. 유난히 우리 반 애들이 자주 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인가.
“그래, 오늘은 어디가 아프신지 한 번 들어나 보자. … 음, 그럴 거면 그냥 조퇴 말고 자퇴 어때? 이 녀석아, 나야말로 학교에서 순직할 판이다.”
이렇게 툴툴거리면서도 아이의 말에 귀 기울이려 애쓴다. ‘그래, 너도 여기까지 오는 게 쉽지는 않았겠지.’ 싶어서다. 지금 몸 상태가 정확히 어떤지, 학교를 나서면 무엇을 어떻게 할 계획인지를 세심하게 묻고 살핀다. 필요할 땐 부모님과 통화도 하고 계획에 없던 상담을 하기도 한다. 조퇴가 아니라 관심이 필요해서 찾아오는 아이들도 꽤 있으므로….
하루는 쉬는 시간마다 찾아와서 앓는 소리를 해대는 우리 반 꾸러기 하나를 조퇴시켰더니, 그의 절친 한 녀석이 쪼르르 달려와서 볼멘소리를 했다.
“선생님, 저도 아파요. 저도 보내주세요.”
이 철없는 녀석을 어찌하리오. 간만에 버럭 화를 내며 교실로 돌려 보내놓고 나니, 한편으로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너에게는 조퇴가 부러운 일이었구나. 아픈 몸이나 피폐한 정신을 이끌고 무언가를 하려면 스스로 납득할 만한 이유나 의미가 있어야 할 텐데 그게 없는 아이들에게, 조퇴는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탈출구인지도 모른다. ‘오고 싶은 학교, 머물고 싶은 학교’는 묘연한 이상인 걸까.
아이들의 몸 상태는 제각각이고, 인내의 극치도 저마다 다르다. 각자에게 나름의 사정이란 게 있으므로, 모두에게 통하는 신통한 묘안도 없다. 몸과 마음이 하는 말에 민감해져야 하고 미련하게 참기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잘 알고 있지만, ‘요즘 것들은 참을성이 없어.’와 같은 꼰대스러운 생각을 아주 버리는 것 또한 힘들다. 반복되는 감정 소모에 지칠 때면, 내가 ‘조퇴 결정권’을 쥐고 있는 담임이라는 사실이 아주 피곤하게 느껴진다. 확 그냥 이렇게 말해 버릴까.
“그래, 다 가라, 다 가!”
그런데 진짜로 다 가버리면 어쩌지? 아무래도 이건 좀 힘들겠다.
이쯤에서 사실을 하나 밝히자면, 나는 한 번도 개근상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 흔한 감기도 그냥 조용히 넘어간 적이 없었다. 감기 기운이 있을라치면 당장 병원을 찾거나 비상약부터 삼키곤 했다. 조급한 대처가 나의 면역력을 약화시키진 않을까 염려하면서도, 당장의 고통과 불편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했다. 묵묵히 참느라 병을 키운 경험은 나와는 먼 이야기였다.
학창 시절은 물론이고 직장인이 되고 나서도 몸과 마음이 소용돌이치는 날에는 망설임 없이 자체 휴식을 선택했다. 대체로 근면성실하게 살았지만, 한 번씩 찾아오는 ‘그 날’에는 주저 없이 일탈을 시도했다. 나의 즉흥적인 일탈이 누군가에게 폐를 끼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나의 빈자리가 타인의 수고로 채워진다는 사실이 겸연쩍으면서도, ‘원래 인간의 삶은 민폐 사슬이지.’ 하며 합리화하곤 했다. 입장이 바뀌어 내가 타인의 몫까지 해내야 할 날이 오면, 그날의 수고로움을 불평 없이 받아들일 준비를 하면서….
출근길에 별안간 발길을 돌려 기차역으로 향한 적이 꼭 한 번 있었다. 엄청난 죄를 짓는 기분이 들어 끊임없이 심장이 쿵쾅댔다. 그러는 사이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나는 무작정 부산을 떠났다. 차창 밖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불현 듯 떠오른 친구가 있어 전화를 걸었다. 계획에 없던 여행과 간만의 재회로 인해 나는 양심의 가책을 잊고 한껏 들뜬 상태가 되어 버렸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나를 보자마자,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야, 너 되게 재밌게 산다.”
그날의 일탈을 무사히 마무리 짓고, 다음날 아침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가뿐한 몸으로 출근했다. 뭔가 켕기는 게 있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간사한 미소를 띤 채….
시간을 돌려 앞선 선택의 순간들을 다시 마주한대도 나는 같은 결정을 내릴 확률이 높다. 아이의 응석을 외면하지 못하고 꾸러기들의 엄살을 눈감아 주기도 하면서, 나의 나약함을 ‘스스로의 안녕을 위한 용단’ 따위의 말로 포장하려 들 테니 말이다. 어떤 게 현명한 선택일까 늘 고민하지만, 나라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관성의 패턴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아마 앞으로도 나는 소소한 일탈에 굴복하며 살아갈 것이다. 가수 자우림의 노래 ‘일탈’ 속 구절,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 점프를, 신도림 역 안에서 스트립쇼를’ 할 정도까진 못 되어도 ‘할 일이 쌓였을 때 훌쩍 여행을’ 떠나는 정도는 기꺼이 해 보려는 마음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