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름 Dec 09. 2022

곧 책이 나옵니다

'별걸 다 말합니다(교사 엄마의 공개 일기)'

 

  코로나로 세상이 떠들썩해지기 직전, 매년 연초에 실시하는 국어교사 연수에 참여했다. 연수 마지막 날, 독립 출판 경험이 있는 두 선생님이 대담을 진행했는데, 두 분 다 나와 동년배였다. 글을 쓰게 된 계기, 집필의 어려움, 출판 과정의 우여곡절과 더불어 최근 기성 출판사로부터 재출판 제의를 받은 일까지, 두어 시간에 걸쳐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당시의 나를 강렬하게 사로잡은 감정은, 다름 아닌 부러움이었다. 두 권의 책을 모두 구매하고 저자 사인까지 받아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 마음을 깊이 들여다봤다. 나는 왜 저들이 부러울까, 책을 낸다는 게 내게 대체 어떤 의미기에. 제대로 된 글 한 편 써본지가 언제인가를 헤아리다, 내가 쓰고 싶은 것, 쓸 수 있는 것, 써야 할 것들을 떠올리며 별안간 비장해졌다. 그간 내 삶을 추동해온 주요 기제는 은밀한 시샘과 어쩔 수 없는 욕심과 충동에 충실한 행동력이었다. 이를 양분삼아 시작한 일들은 스스로를 옥죄기도 했으나 무언가를 해내게도 했으므로,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해 고3 담임을 맡는 바람에 글 한 편 써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몇 개의 계절을 보냈다. 수능 이후가 되어서야 학교 업무에 다소간 여유가 생기면서 여러 글쓰기 모임을 전전하기 시작했다. A4 1~2장짜리 글을 쓰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완성된 글을 평가하는 일과 한 편의 글을 완성해내는 일은 지극히 다른 차원의 작업이었다. 그동안 쉽게 넘겨왔던 책장들이 새삼 묵직하게 느껴졌다. 한 문장, 한 단어에 서린 저자의 오랜 고심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사실 그즈음 나를 글 쓰게 한 건, 책이라는 구체적인 물성, 출판이라는 원대한 목표가 아니었다. 다만 그때그때 완성해낸 글 한 편 분량의 뿌듯함이었다. 정제되고 완성된 한 권의 책이 아니라 따끈따끈한 낱장 형식의 글, 프로 작가 대신 지척의 생활인이 써낸 어딘가 부족한 글들은 색다른 날것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무엇보다 글을 통해 만난 인연은 그사이 내가 맺어온 관계 방식들과는 결이 달랐다. 뭐랄까, 품위 있는 무장해제, 다자간 고해성사 같달까. 느슨하지만 끈끈한 연대 속에서 한 편씩 한 편씩 글 탑을 쌓아 올렸다.




  여러 모임을 전전하며 글을 쓰기 시작한지 근 1년 반이 다 돼가던 무렵, 짬짬이 모아둔 글이 얼추 40꼭지를 넘어섰다. 그러던 중 협성문화재단에서 실시하는 에세이 공모전 ‘뉴북 프로젝트’ 소식을 우연히 접하게 됐다. 공모전이라니, 생각해 본 적 없는 선지였다. 무심히 넘기려던 즈음, 공교롭게도 한 지인이 내게 그 공모전을 귀띔해 주었다. 희한하게도 새삼 흥미가 일었다. ‘에이, 뭐 하러.’ 싶었던 일이 ‘흐음, 한 번 도전해 볼까.’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50%이상 완성된 원고’가 지원 조건이었다. 주제 상 다섯 분야가 있었으나, 나에게 가장 적합한 주제는 ‘나의 열정과 경험을 담은 글’이었다. 그간 써온 글들을 훑어보니 교사, 엄마, 여성이라는 내 정체성에서 출발한 글들이 여러 갈래로 뻗어 있었다. 학교 운영 체제와 교사 집단에 대한 회의감, 학교에서 만난 각양각색의 아이들, 기혼 여성으로서 느끼는 고충, 주말 부부가 된 이야기, 부모 세대에 대한 연민, 아이 교육 문제와 관련된 고민 등 생활밀착형 글들이 주를 이루었다. 글의 길이도 제각각이고, 불과 1년 전에 쓴 글인데도 주제의식이 빈약해 보이는 글들이 많았다. 일정 상 다듬고 말고 할 시간도 없어 죄다 밀어 넣었다. 크게 다섯 장으로 나누어 글을 분류하고, 모자라 보이는 부분은 차례 상으로나마 채워 넣었다. ‘이래서야 되겠냐.’는 생각이 불쑥 치밀곤 했으나, ‘안 되면 그만이지.’ 하는 자세로 그냥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책의 가제도 이름하야 ‘별걸 다 말합니다’. 실제로 별걸 다 말하고 있었으니까.


  5월 말 기한에 근근이 맞춰, 4쪽짜리 기획서와 원고 60여 쪽을 제출했다. 기대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겠으나, 정말이지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첫 시도에 사활을 걸기엔 나는 아직 초짜에 불과했으니까. 어영부영 한 달을 보내고, 6월 말에 1차 서류 합격자 발표가 떴는데 이게 웬일, 내 이름이 명단에 있는 거였다. 나를 포함해 2차 면접 대상자가 총 11명이었다. 불현듯 다시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허 참, 사람 마음이란. 바로 일주일 뒤가 면접이었다. 다시 원론적인 고민에 빠졌다. 왜 내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고 싶은가. 읽는 이들에게 어떤 책이 되었으면 하는가.


  실제 면접에서 처음으로 받은 질문도 그와 비슷했다. 어떻게 글을 쓰기 시작했는가, 왜 책을 내려고 하는가.


  현직 교사로서, 엄마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일상에서 마주한 숱한 질문들이 있었어요. 이를테면 학생은 꼭 공부를 해야만 하는가, 공부를 잘하면 어떤 것들이 유리해질까, 지금 학교는 사회적으로 어떤 기능을 수행하고 있나, 결혼은 여성에게 어떤 의미인가, 엄마와 부인과 며느리에게 으레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아이는 꼭 낳아야 하나, 왜 둘 이상은 낳으라고들 하는 걸까 같은 것들이죠. 저 자신을 돌볼 요량으로, 질문에 대한 고민의 과정을 기록하기 시작했어요. 그렇다고 단순히 그때의 감정을 배설하기 위한 일기 같은 글은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과 나눌 수 있는 글, 서로에게 공감과 위로와 자극이 되는 글을 쓰고 싶었어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출판에 대한 생각을 품게 됐습니다.


  ‘경쟁 도서와의 차별화 요소’ 부분을 인상 깊게 읽었어요. 그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줄 수 있을까요.


  네, 사실 교사 작가의 책은 시중에 넘치잖아요. 그래서 그 책들과는 조금 차이를 두고 싶었어요. 잘된 수업만 추려서 소개하거나 자녀 교육에 도움이 되는 팁을 알려주는 게 일반적이니까요. 교사 엄마에게 이 사회가 가지는 편견, 선입견, 기대 같은 것들이 있는데 그걸 좀 깨고 싶었어요. 미화된 현실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실재하는 날것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고민의 지점을 공론화하고 싶었습니다.


  기간제 교사와 관련된 이야기,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와 만난 경험 등을 흥미롭게 읽었어요. 하지만 이야기가 뭔가 끊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러 분야의 이야기를 살짝씩 건드리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랄까. 단순히 학교 이야기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엄마, 부인, 며느리, 여성으로서의 이야기가 함께 들어가 있어 복합적이라는 장점이 있기는 해요. 하지만 지나치게 사적인 이야기들도 많고 소재가 광범위해서 전체적인 주제의식이 선명하지 않아요. 뒤로 갈수록 맥이 빠지는 느낌도 들고요. 교육 관련 문제로 주제를 좀 더 집약해서 사회적으로 공론화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심화하여 다루어 주면 좋겠어요. 현직 교사라는 정체성을 십분 발휘해서요. 그 안에 엄마나 여성으로서의 이야기가 함께 버무려질 순 있겠지요. 그동안 또 더 써놓은 글이 있나요? 최종 원고 마감일까지 두 달여 정도밖에 남지 않았는데, 책을 완성도 있게 마무리할 여력이 되시나요?


  물론입니다. 저 지금 휴직 중이거든요. 얼마든지 더 주력해서 쓸 수 있습니다.


  어디서 그런 배짱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호언장담까지 해가며 내 능력치를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모든 게 불확실한 마당에 무슨 말인들 못하랴. 2차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더라도 면접을 통해 얻은 것이 많았기에 여한은 없었다. 총 네 명의 면접관들이 나의 글을 모두 꼼꼼히 읽어본 듯 했고, 거기서 우러나는 진심어린 조언들에 적잖이 황송할 지경이었으니까. 그날의 조언들 덕분에 앞으로 써야 할 글들이 보다 선명해졌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감사하게도 2차 합격자 명단에도 내 이름이 떡하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총 5명의 대상자가 멘토의 지원을 받아 9월 말까지 최종 원고를 제출해야 했다. 2차 합격 발표가 7월 중순이었으니 2달 반 정도의 시간이 남은 셈이었다. 면접 중에 나에게 가장 많은 조언을 해주셨던 박경희 작가님이 내 멘토를 맡아주셨다. 앞으로의 집필 방향에 대해 논의를 해보자고 하셔서 대뜸 내가 서울로 찾아가겠노라고 호기를 부렸다. 온라인상으로도 얼마든지 의견을 교환할 수는 있겠지만, 대면에서만 가능한 디테일이 분명 있을 터였다. 작가님의 따뜻한 환대와 무한한 격려 속에서 세 시간에 걸친 논의가 이어졌다. 뺄 부분, 더할 부분, 수정할 부분들을 짚어가며 책의 전체적인 틀을 잡아나갔다. 교사 집단 및 학교 문화에 얽힌 비화, 수업이나 담당 학급을 통해 만난 아이들 이야기, 엄마로서 마주한 교육 문제 및 기혼직업여성의 삶, 아이에게 읽어준 그림책을 통해 전하고 싶은 말들, 이렇게 네 개의 장으로 나누어 이야기를 전개하기로 했다.


  어느덧 8월이 코앞이었다. 적잖은 글을 덜어내고 나니 완전히 새롭게 써야 할 글이 15편이나 되었다. 총 40편이 조금 넘는 전체 분량에서 15편을 새로 써야 한다니. 게다가 기존의 글들도 손봐야할 것이 많았다. 9월 말이라는 기한까지는 두 달밖에 남지 않은 상황. 눈앞이 캄캄했다. 게다가 아이가 여름방학에 돌입한 직후였다. 하루에 학원 가는 몇 시간 외에는 내가 계속 데리고 있어야 할 판인데, 이를 정말 어쩐담.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 어떻게 글을 써냈나 싶다. 짧게는 이틀, 길게는 나흘에 걸쳐 글 한 편을 뽑아냈다. 한 편을 완성함과 동시에 다음 글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8월 한 달간은 정말이지 하루하루가 전쟁 같았다. 오전 내내 아이랑 씨름하다 오후가 되어서야 학원에 보내고 나면 바로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두 시간 가량이 지나고 학원마저 파하면 다행히도 아이가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놀아주어 다시 한 두 시간을 벌곤 했다. 해가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아이를 밖에서 혼자 놀린 채 글쓰기에 전념했다. 아이가 돌아오면 씻기고 밥 먹이고 놀아주고 재운 뒤에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새벽 2~3시를 넘기기 일쑤였고 매일 피곤에 쩔어 있다 보니 신경은 나날이 예민해졌다. 그래도 주말에는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카페로 피신하여 작업의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8월 한 달을 꼬박 그러고 났더니 몸이 축나는 느낌이었다. 몸도 몸이지만 그즈음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이렇게 작업을 해서 될 일인가 하는 회의감이었다. 너무 날림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오랜 시간 생각을 벼리고 차분하게 다듬어야 좋은 글이 나올 텐데, 훗날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들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내내 불안감에 시달렸다.




  마감이 없었다면 못 썼을 글들이었다. 15편의 글을 새로 쓰고, 기존의 글을 다듬고 보태는 사이 두 달의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무거운 목과 어깨, 뻐근한 손목, 충혈된 눈, 노트북 화면을 노려보며 흘리던 식은땀, 깜짝 놀랄 정도로 빠지던 머리칼, 올 여름을 요약하면 앞서 나열한 것들만 덩그러니 남았다. 마감 기한 직전까지 여러 번에 걸쳐 전체 글을 읽고 또 읽었지만 매번 고쳐야 할 것들이 나타났다. 고치고 고치다 여전히 미진한 구석을 남긴 채, 마감 당일 드디어 최종본을 재단 메일로 전송했다. 후련한데 허탈하고, 뿌듯한데 찜찜했다.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마시니 어느덧 가을 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바람이 눈에 띄게 선선해졌고 나뭇잎들이 하나둘 옷을 바꿔 입고 있었다. 간만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때마침 진행 중이던 부산국제영화제를 즐겼는데, 예상치 못한 복병이 남아 있었다. 바로 인용구 저작권 문제. 사실 내 글은 큰 범주에서 보면 독후감이나 다름없다. 책을 읽다가 꽂힌 한 문장, 한 단락에서 비롯된 나의 기억이나 감정들이 한 편의 글이 된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러다보니 직접 인용된 시 구절이나 책 속 문장들이 꽤 있었고, 그게 문제가 되었다. 글 속에 있는 인용 구절을 모두 정리해보니 총 서른 부분에 달했다. 다행히도 모든 부분이 재수록 허가를 요하는 건 아니었는데, 이와 관련된 정확한 법 규정이 없어서 헷갈리는 부분도 많았다. 인용 분량과 도서의 성격 등을 고려하여 재단 측에서 준 피드백을 근거삼아, 일일이 전화나 메일로 재수록 허가를 요청했는데 출판사 별로 반응이 천차만별이었다. 흔쾌히 허가해 주는 데가 있는가하면, 소정의 재수록료를 청구하는 경우도 있고,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금액을 요구하는 곳도 있었다. 특히 시 전문을 실은 글 두 편이 문제가 되었는데, 사정상 시를 빼고 글을 재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도 인용 분량을 줄이거나 간접 인용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느라고 또다시 10월이 훌쩍 지났다. 역시 책 출간은 만만찮은 작업이었어. 나 혼자 끄적이는 수준과는 천지차이임을 매순간 실감했다. 이후 교정교열 및 표지 디자인, 내지 디자인 등에 관해 협의를 마치고 나니 11월도 막바지였다. 그 사이 단풍은 거의 다 떨어졌고, 앙상한 나뭇가지만이 겨울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얼마 전, 늦은 밤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든 적이 있었는데, 어쩐지 심장이 벌렁거리고 눈이 말똥말똥한 게 오늘 자기는 글렀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카페인을 과다 섭취했을 때와 비슷한 증세였다. 사실 다른 이유는 아니고, 정말이지 너무나 벅차고 행복해서 그랬다. 이런 적이 내 인생에 딱 한 번 더 있었는데, 바로 아이를 낳은 날 밤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숱한 고난(?)의 시간에 대해 미처 알지 못한 채, 나는 너무도 순진하게 엄마 된 기쁨을 만끽했다. 소위 ‘트럭이 배 위로 지나가는 듯한 고통’을 ―물론 무통 주사를 맞았지만― 이겨냈다는 뿌듯함, 새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 내 삶에 던져진 변화의 씨앗을 온몸으로 감지하느라 잠 한숨 이루지 못했던 그 밤, 그 밤이 딱 그랬다. 살면서 이런 쾌감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 ―그것도 두 번씩이나―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누구에게라도 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새 생명을 길러내는 일의 중대함과 어려움을 덜컥 깨달아 버린 후, 걱정과 두려움으로 밤을 지새우던 날들이 곧이어 찾아온 것처럼, 그날 밤의 설렘도 곧 현실의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모든 과정을 마무리 짓고 출판만을 앞두고 있는 지금, 내 인식의 한계가 만천하에 드러나리라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한다. 물론 내 책 따위는 그 어떤 일말의 파장도 일으키지 못한 채 거대한 출판 시장에서 소리 소문 없이 묻힐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찌 되었건 내 손을 떠난 책이 다만 몇 십 권이라도 다른 누군가에게 읽히는 상상을 하면, 손발이 오그라들고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어쩌면 내가 염려하는 것은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 불특정다수의 독자가 아니라, 내 삶의 어느 단면에서 잠시라도 일상을 공유했던 이들의 반응일 것이다. 나라는 사람과 내 책 사이의 괴리감을 가장 먼저 알아챌 이들이 바로 그들일 것이므로. 책 속에서 활자의 힘을 빌려 꽤나 정제되고 다듬어진 내가 현실의 나를 바라보고 서 있다. 이편의 나는 저편의 나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이젠 네가 나를 이끌어주기를, 그래서 말이나 글이 삶과 일치하는 사람이 되어 보자고. 적어도 내가 내뱉은 말들이 부끄러워지지 않도록 말이지.


매거진의 이전글 불법무단사설야매시인학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