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기록 그리고 출발
기차를 네 번 갈아탔다. 서울에서는 지하철을 갈아타는 횟수가 늘어나면 스멀스멀 짜증이 올라왔었는데, 이 곳에서는 귀찮다기보다는 재미있었다. 서울에서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파도에 휩싸여 다니지 않고 보물 찾기 하듯 내가 탈 열차를 찾아가는 재미가 꽤나 쏠쏠했다.
어디를 가도 더운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로마와 달리 스위스는 공기부터가 서늘했다. 스위스에서는 라우터브루넨의 호스텔에서 사흘 밤을 지낼 계획이어서, 숙소 도착 전 마트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 등을 충분히 샀다. 캐리어와 식료품으로 두 손과 양 어깨가 묵직해졌지만 마음만은 왠지 모르게 여유로웠다.
멀리 여행을 오면 특히나 유럽 같은 곳은 여행자에게 무리한 일정을 유혹해온다. 다시 언제 이 곳을 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 머릿속으로만 알고 있었던 수많은 관광지들, 조여 오는 여행 기간의 압박. 스르륵하고 빡빡한 일정 속에 자기 존재를 밀어 넣으면 어느 순간에 탁하고 머리가 멈춰질 때가 있다.(여행 중이든 여행 후든) 내가 무엇을 보러 온 것인지 아니면 무엇을 보았다는 사실을 만들기 위해 온 것인지 헷갈리는 순간이 다가오는 것이다.
유럽에 도착한지 일주일 정도밖에는 안 되었지만, 그동안 쌓여 있던 피로는 사실 적은 양은 아니었다.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정하고 이래저래 주변을 정리하던 시간들, 여행을 준비하던 시간들, 유럽에 도착해 하루하루를 빼곡하게 채워서 보냈던 시간들. 단순해지기 위해서는 비워야 하는데 비우기는커녕 계속 채우고만 있었다.
숙소에 도착해 밥을 지어먹고는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다시 식사를 하고 잠이 들었다. 이어지는 잠이 지칠 법도 한데, 지치기보다는 더 반갑기만 했다. 다시 일어난 정오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겨울비나 다름없는 차가운 빗물을 배경으로 맥주 한 잔을 마셨다. 그리고 다시 점심식사.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온 유럽인데 이렇게 무계획으로 보내다니 라는 생각을 하니까 기분이 좋았다. 쉬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너무 두려워했을 것이다.
문명의 발달은 인간의 삶을 극심하게 세분화시켰다. 기본적인 의식주의 해결을 넘어서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익히지 않으면, 흔히 말하는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가 없다.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주어진 하루의 시간은 동일하다. 하지만 동일한 시간에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익혀야 하니 얼마나 바쁠 수밖에 없는가. 사실 바쁘다는 것 자체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나쁜 것은 ‘바쁘다’가 아니라 ‘바빠서’이다. 많은 사람들은 바빠서, 점점 더 빠르게 그리고 무심하게 삶을 지나쳐 가고 있다.
‘나는 왜 사는 것일까?’와 같은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냥 단순하게 지금 무엇을 하며, 무엇을 원하는지에 관해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묻고 있는지 아니면 다들 그렇게 사니까, 그것이 보편적이라고 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도태되니까 하는 생각에 살고 있지는 않은지가 궁금한 것이다.
사실 이런 상황은 개개인별로 삶에 대한 반성과 고민이 부족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목표를 향해 미친 듯이 바쁘게 살지 않으면 생존하기조차 힘든 상황이, 오늘날 한국에서의 삶을 더 무심하고도 무감각하게 살아지게끔 만들어 가고 있다. 결국 어떻게 살아야 더 좋은 삶인지 보다는 어떻게 해야 더 잘 사는 것인지가 삶에 대한 고민의 전부가 되어 가고 있다.
물론 더 잘 사는 삶이 더 좋은 삶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더 잘 사는 삶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우리에게 충분한가? 누군가 기회가 부족하다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그 누군가의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인가? 기회가 충분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음에도 오늘날 공무원과 같은 '더 잘 사는' 보다는 '더 안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직장에 대한 선호가 이렇게나 높을 수 있을까?
게다가 일터의 상황도 그런 무심한 삶을 요구한다. 나만 그런 것이었던가? 회사를 다닐 때 평일은 아침 7시 20분 정도까지 출근해서 밤 10~11시 퇴근, 주말도 하루는 꼬박꼬박 출근했으니, 나만 여유가 없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OECD 국가 중 노동시간 1위라는 기록은, 다른 수많은 사람들도 나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결론을 보여준다.
그냥 대충 챙겨 입고 숙소 밖으로 나왔다.
한가로운 걸음걸이로 숙소 앞에 있는 트뤼멜바흐 폭포를 봤다. 마을에 있는 작은 공동묘지도 둘러봤다. 아이들이 흙장난, 물장난도 하는 작은 놀이터도 봤다. 8월 초라는 시간에 어울리지 않을 차가운 날씨였지만, 그저 편안했다. 넉넉한 마음으로 저녁을 지어먹고 와이프와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