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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원 Dec 07. 2015

융프라우 #2
-눈부심 그리고 '비전'-

여행, 기록 그리고 출발

아침 6시 반 기상. 오랜만에 만난 숫자들의 시간이었다. 불과 2주 전이었으면 늦지 않기 위해 허둥지둥 세수를 하고 택시를 탔을 시간이었지만, 이제는 충분히 여유가 있는 시간이었다. 아침을 대충 챙겨 먹고는 ‘Top of  Europe'이라는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에 가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높이 3,454m. 한국 사람의 머릿속에 흔히들 남아있을 3,000m가 못 되는 백두산 그리고  2,000m가 못 되는 한라산을 감안한다면, 쉽사리 가늠되지 않는 높이다. 그것도 등산이 아닌 기차로 운행하는 곳의 높이라면 더더욱. 


사람들을 싣고 있는 기차의 고도가 높아질수록 주변의 공기는 차가워졌고, 머리는 조금씩 아파왔다. 반드시 추울 것이라 생각하고 껴입은 여러 벌의 긴팔 옷이었지만, 한여름의 이곳에는 부족한 옷차림이었다. 클라이네 샤이덱(Kleine Scheidegg)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산의 한 가운데를 관통해 나아간다는 기분으로 1시간쯤 지나자, 융프라우요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눈에 눈이 부셨다. 겹겹이 쌓인 하얀 눈을 처음 본 것이 아니었는데, 이렇게나 눈부심을 느낄 줄은 몰랐다. 홀린 듯 사진을 찍고는 전망대 밖으로 나갔다. 온몸을 파고드는 추위만큼이나, 내 눈을 향해 쏟아져 내리는 눈빛이 도저히 선글라스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자연에 놀란다는 표현이 이 곳의 풍경에 가장 자연스러운 표현이었다. 그만큼이나 놀라운 것은 이런 곳에 기차역을 만들었다는 사실이었다. 16년의 공사기간, 계획했던 공사비용의 두 배 투입, 말하고 글로 쓰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덕분에 매년 71개국에서 방문하는 스위스 최고의 관광지 중 하나가 되었지만, 건설하는 기간 중에 이러한 결과를 상상할 수 있었을까? 


흔히들 ‘장기적인 비전’이 중요하다고 쉽게 이야기한다. 특히 국가나 기업, 단체와 같은 조직 운영에 있어서는 ‘장기적인 비전’을 굉장히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해당되는 조직이 크면 클수록 그런 경향은 더욱 강하다. 그런데 실제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조직의 계획을 짜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실행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내가 살았던 서른다섯 해라는 시간 동안, 그런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경우를 내 주위에서는 확인하지 못 한 것 같다. 어디선가 언젠가 각종 매체들을 통해 들어본 적은 있는 것 같다. 하나의 목표를 향한 오랜 기간의 준비가 결실을 이루었다는 뉴스는 언제나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장기간의 비전을 가지고 제도를 만들고 준비해서, 내가 살고 있고 몸담고 있는 곳이 개선되었다는 이야기를 겪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나’라는 사람이 주변에 무심했기에 그런 사실을 지나쳐 버려서일까? 아니면 그러한 장기적인 비전이 만들어지지도 않았거나, 만들어도 폐기되었거나 혹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일까?


IT가 고도로 발달한 지금의 세상은 엄청나게 빨리 변한다. 어쩌면 빠른 속도의 변화는 ‘장기적인 비전’이라는 어휘의 사용이 적합하지 않은 상태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단체든 기업이든 국가든 조직의 크기와 상관없이 그 중심에 사람이 있다는 점이다. 조직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식으로 살아갈지 혹은 살아가게 할지에 대한 고민이 결국 장기적인 비전의 핵심이다. 


사실 융프라우요흐까지의 철도를 구상하고 공사를 시작했던, 구에르 첼러라는 사람이 이 곳 사람들의 생활에 대해 얼마나 고민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나서도 그리고 계획했던 것보다 공사가 길어지고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음에도 철도가 완공되었던 것은, 결과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믿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비전’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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