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기록 그리고 출발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은 얼마나 작은 것인가? 뮌헨이라는 도시를 여행 계획에 넣게 된 것은 지도상에서 여행 루트를 짜다가 생긴 일이었다. 기차를 타고 움직이는 여정에서 하루의 너무 긴 시간을 철길로만 허비하지 않기 위해 중간중간 기착지를 넣다 보니 계획에 포함된 도시가 뮌헨이었다.
사실 나에게 뮌헨이라는 도시는 옥토버페스트, 맥주로 이어지는 연상작용의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들르고 머무르기로 해 어디를 갈지 찾기 시작했다. 여행 가이드북에서 금세 눈에 들어온 세 개의 미술관. 알테(Alte), 노이에(Neue), 모데르네(Moderne) 피나코테크. 연대기처럼 나열된 미술관 세 개가 한 군데 나란히 모여 있었다. 유명한 그림 무엇이 전시되어 있다는 사실보다 미술관을 그런 식으로 건설했다는 사실이 이채로웠다.
세 개의 미술관 모두 일요일에는 입장료가 1유로여서 무리인걸 알면서도 일요일에 세 개의 미술관을 모두 돌아보기로 했다. 한 달이라는 데드라인 안에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겠다는 욕심 그리고 필수적인 근검절약의 상황. 다른 선택을 할 수도 하고 싶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14~18세기 유럽 회화 중심의 알테, 19세기 인상파 등이 주축인 노이에, 20세기 이후 각종 시각예술이 전시되어 있는 모데르네까지 수많은 그림들을 스치듯 훑어 내려갔다. 사실 예전에는 그림을 보면 습관처럼 사진을 꼭 찍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 습관을 버리게 되었다. 그림마다 열심히 사진을 찍다 보면, 사진을 찍으려는 건지 그림을 보려는 건지, 지금 이 곳에 내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가 불분명해졌다. 다만 다시 한 번 이 그림을 보아야 한다는 느낌이 들 때는 사진을 찍었다.(물론 사진 촬영이 허용된 곳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막스 슬레포크트(Max Slevogt)의 'The day's work done', 한국말로 하면 ‘퇴근 후’, ‘일과 후’ 정도가 적당한 표현일 것 같다. 하루 일을 마친 것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부인 앞에 앉아 있다. 남성의 표정을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하루의 피로함보다도 그를 응시하는 아내의 표정이 특이했다. 살짝 올라간 한쪽 입꼬리와 내리 깔아진 시선은, 언뜻 보면 살짝 웃는 표정처럼 느껴지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웃음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나타날 수 있는 감정은 무엇일까? 순간 떠오른 것은 ‘어이없음’ 이었다. 농담처럼 진담처럼 듣거나 내뱉던 ‘왜 그렇게 사니?’라는 말이 그림 속의 여성에게서 떠올랐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듯, 다람쥐 쳇바퀴 구르는 것처럼 어이없는 일상을 반복하던 내 모습이 어른거렸다. 누구도 어이없음에 대한 대안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런 대안을 집중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무엇이 어이없는 것인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아마 이 글을 본 누군가는 어디든 취업을 해서 월급을 받아 신속하게 가정을 꾸려 아이를 낳고 살아가면 되지 않느냐는 질문을 나에게 되물을 것만 같다.
또한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루하루 밥벌이가 얼마나 중요한 데, 그 때문에 하고 있지 않아도 될 야근도 하고 가고 싶지 않은 회식도 따라 가지만, 그것쯤이야 무슨 상관이겠는가? 맞선도 주선하고 집도 싸게 구할 수 있게 해주는 데,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것이겠는가?
사실 문제는 우리가 너무 빠르게 발전했기에 발생한 것일 수 있다. 지금과 60여 년 전을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예전의 누군가에게는 밥을 먹을 수 있을지가 가장 큰 문제였지만, 지금의 누군가는 맛있고 풍성한 밥을 먹을 수 있을지가 삶의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누군가가 배부른 걱정을 한다는 것은 옳지 않은 지적이다. 발전과 변화는 삶의 겉모습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생각도 바꾸기 때문이다. 보릿고개를 이겨낸 이야기는 전혀 다른 문제를 안고 있는 누군가에게, 그저 용기를 북돋우는 동화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이상의 실질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지금의 기준으로만 세상의 옳고 그름을 재단할 수는 없다. 지금의 모습은 과거의 경험이 없었다면 나타날 수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노소와 상관없이 같이 살아가는 삶의 풍경에서, 결국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수밖에 없다.
진정한 문제는 이런 고민을 ‘함께’ 하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모든 것에 능통한 사람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듯, 각자가 알고 있는 세상은 사실 좁디좁은 것임에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