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기록 그리고 출발
기억의 느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십 년 전 처음 빈에 왔을 때 받았던 느낌은 우아함과 여유로움이었다. 어느 거리에서든 클래식 음악이 은은하게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오직 클림트의 ‘키스’ 때문에 방문한 도시였는데, 막상 도착하니 그냥 도시 자체가 좋았었다. 다시 도착한 빈의 인상 또한 다르지 않았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클림트의 그림을 보기 위해 벨베데레 궁으로 향했다. 사실 십 년 전, 클림트의 ‘키스’를 보고는 한 십 분을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편안하지는 않지만 거부할 수 없는 것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다시 그런 느낌을 기대하고 보았지만 아무래도 예전 같지는 않았다. 그림 자체는 여전히 보고만 있어도 좋고 대단했지만, 그냥 나 자신이 그 그림에게는 더 할 말이 없어진 느낌이라고 할까? 오히려 다른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클림트의 ‘Mother with children'
사실 ‘키스’를 비롯한 잘 알려진 클림트의 그림들은 화려하다. 강렬한 황금색과 관능적인 느낌이 그림 전체를 지배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에 비해 이 그림은 화려함보다는 마치 안정을 찾고 싶어 하는 사람이 그려낸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림뿐만 아니라 인생 또한 화려하게 보낸 편인 클림트의 마음 한 구석이 느껴진다. 누구든 위안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데 가끔은 그런 사실을 쉽게 잊어버린다. 특히 나 자신에 대한 위안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위안에 대해서는 더욱 쉽게. 누구나 위안받고 싶어 한다는 것은 당연한 건데, 우리는 너무 쉽게 ‘나만 그런 것’인 듯 살아가는 것 같다. 생존 자체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인 것일까? 곳간이 차야 예절을 알 수 있는데, 채울 곳간마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려나. ‘함께’라는 단어가 이렇게나 쓰기 버거워지다니.
다음 날 아침 일찍 쇤브룬 궁전으로 향했다. 여행의 황금과도 같은 점심과 오후 시간이 이상고온 탓에 너무 더워 일찍 어딘가로 피신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문 여는 시간임에도 사람 수가 엄청났다. 특히 단체로 온 관광객들 특히 중국인 관광객들의 수가 대단했다. 밀려가듯 궁전 내부를 둘러보고는 정원으로 나왔다.
군데군데 조깅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평일 오전 열 시에 조깅을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사실 이런 생각도 고정관념에 불과하다. 각자의 삶의 방식이 있는데 일반적이지 않다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시선을 갖다 댈 필요가 있는가? 그런 점에서 나 또한 일반적인 한국 사람의 버릇 같은 '보편성 중시'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었다.
사실 사는 모습은 무척이나 다양한데 다들 비슷한 모습과 목표를 은연중에 강요받고 있다. 물론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을 수 없듯 비슷함을 벗어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에 대한 일반적인 시선은 따뜻하지 않다. 나 역시 여행을 다녀온 뒤 때때로 평일 오전 열 시에 한강변을 뛰었다. 간혹 운동 중에 눈이 마주치는 분들의 시선은 의구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그런 시선을 예로 들지 않아도, 한국 사람들 다수가 타인의 시선에 많은 신경을 쏟고 살아간다. 무엇인가 다른 삶의 모습이 보이면 일단은 부정적인 시선. 왜 그럴까? 각자의 삶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사실 지극히 당연한 것인데도 말이다.
엄청난 더위였다. 한국처럼 습한 것은 아니었지만 태양빛에 있다가는 타들어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결국 궁전을 둘러본 후 숙소로 돌아갔다. 노을이 질 무렵 문 밖으로 나섰다. 오타크링거(Ottakringer), 처음 숙소가 이 지명의 역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는 별 느낌이 없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이름이었지만 무엇인지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구글은 바로 결과를 확인시켜 주었다. 맥주. 한 번쯤 마셔본 맥주, 그 양조장이 있는 곳이었다.
숙소로부터 걸어서 3분 거리라는 환상적인 사실에 기뻐하며 양조장으로 향했다. 공장 앞마당이 뮌헨의 비어가든처럼 만들어져 있었다. 시끌시끌하지만 너무 부담스럽지는 않은 분위기 속에서 맥주를 마셨다. 생각해보면 한국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분위기인데 그냥 부러운 느낌이었다. 여행을 와서 그런 것일까? 구성원과 복장의 차이 때문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직장 사람들과 술집을 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곳은 가족끼리 이웃끼리 동네 산책하듯 가벼운 복장으로 나와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경우가 많아 보였다. 저렇게 마셔본 적이 언제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셔야 한다는 혹은 마시기라도 해야 한다는 느낌보다 그냥 즐기는 것 같은 느낌.
이어서 음악 필름 페스티벌이 열리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의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크린 맞은편 관객석 구석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 사진 찍는 사람들. 장터가 열린 듯 축제의 먹거리를 파는 곳에서는 열심히 만들고 열심히 먹고 있었다. 좀 더 사람이 많아 번잡하기는 했지만 답답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행복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