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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원 Jan 18. 2016

런던 #1
-Look left, 당연하지만 필요한 일-

여행, 기록 그리고 출발

몸을 움직였다. 쓰린 속만큼이나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파왔다. 전 직장의 선배와 함께 술을 마시던 장면만 선명했다. 순간순간의 기억마저도 희미했다. 옆에서 힘겹게 자고 있는 아내에게 미안했다. 


함께 일했었던 직장의 선배가 런던에서 근무하고 있어 아내와 셋이 함께 저녁을 먹었다. 빈  속에 나도 모르게 들이키다 보니 그냥 정신을 잃었다. 아내 말로는 취해서 온갖 진상을 피우다 잠이 들어서는 일어나지를 않아서 결국 응급실까지 실려 갔다고 했다. 특별한 여행의 일상을 내 힘으로 조각조각 부숴버린 꼴이었다. 


무엇이 그렇게나 응어리졌었는지. 예전에 함께 일했던 사람을 만나니, 댐에 가둬둔 물 내려 보내듯 답답한 감정을 쏟아냈었나 보다. 좀 더 무난하게 풀어냈어야 했는데, 부족한 남자 때문에 애꿎은 아내만 고생했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에 한참이나 어찌할 줄  몰라하다가 오전이 지나서야 함께 숙소 밖으로 나왔다. 조각난 일상을 다시 짜 맞추어야 하는데 마음속은 온통 후회뿐이었다. 어디로든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에 빅벤으로 향했다.

웨스트민스터 역 밖으로 나오니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이라고 해도 이렇게나 사람이 많이 찾는 곳이었나 하는 생각에 살짝 당황했다. 특별한 날이었다. 8월 15일. 우리에게는 광복 70주년, 그들에게는 전승기념일이었다. 별 생각 없이 방문한 거리에서 전승기념일 기념 퍼레이드를 볼 수 있었다. 


의외로 퍼레이드는 조용하게 진행됐다. 흔한 퍼레이드에서 기대되는 화려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인파와 이를 통제하는 수많은 경찰들 속에서 조금씩 이동하면서 행사를 지켜봤다. 순간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고 차 한 대가 나타났다. 



영국 여왕이었다. 차 속에서 차 창밖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우연치고는 대박이었다. 흘깃 스쳐간 시간이었지만, 영국 여왕을 보게 되자 특별한 시간으로 변모했다.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박수 치면서 휘파람을 불어 댔다. 휙 하고 사라진 여왕의 한 조각 모습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특별한 순간이었다는 생각을 하는  듯했다. 아내도 무척 신기해하며 여왕이 지나간 자리에 눈을 떼지 못했다. 


반복되는 일상에 여행은 강렬한 자극이다. 수많은 일상들이 고민하지 않아도 매끄럽게 진행된다. 출근에 연동되어 있는 기상시간과 활동들 그리고 습관처럼 진행하는 특정한 요일의 일들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의욕적으로 새로운 일을 시도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이 단순한 변명이 아닐 정도로 각자의 일상생활은 빼곡하게 채워져 있기 십상이다. 여행은 이러한 일상을 단번에 모험으로 바꿔 놓는다. 매 순간이 선택이고 도전이다. 호기롭게 어느 곳을 가기로 했다가 길을 헤매 포기하기도 하고,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한 입 먹어보고는 다시는 이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문제는 모든 모험이 해피엔딩이 될 수 없다는 것에 있다. 즐겁기 위한 시도들이 짜증으로 이어지는 경험은 때때로 여행을 최악의 상황으로 만들기도 한다. 특히 여럿이 함께 하는 여행일수록 그러한 상황은 쉽게 발생한다. 나에게는 좋기만 한 것이 동행에게는 그냥 싫은 것일 수도 있다. 톱니바퀴 맞추듯 최적화해 놓은 일상에서 벗어난 덕분에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잃기도 한다. 



운 좋게도 마주친 여왕 덕분에, 깨져 버린 특별한 일상을 다시 맞출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 같았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지나 버킹엄궁으로 향했다. 역대 영국 왕들이 즉위식을 올렸던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근위병 교대식으로 유명한 버킹엄궁은 ‘클래식’이란 이런 것이라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런 고풍스러운 느낌과 무게감 있는 자태보다 내 눈에 들어왔던 것은 따로 있었다. 

‘Look left'



대부분의 국가와는 달리 좌측통행을 하는 영국의 횡단보도에서 흔하게 눈에 띄는 표식이다. 많은 여행자들이 영국은  좌측통행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평소와는 반대방향으로 차가 움직이기에 알고 있지 못하더라도 방문하는 순간 금세 알아차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관처럼 오른쪽을 바라보며 길을 건너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Look left'는 당연한 것이지만 필요한 것이다.     


아내와 함께 여행을 하며 매일매일 특별한 일상을 같이 짜 맞추어야 하는 데 그러지 못했다. 함께 지금이라는 시간을 만들어가는, 당연하면서도 필요한 일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Look left!' 당연하지만 필요한 일을 다시 시작할 상황이었다. 런던에서의 일상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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