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기록 그리고 출발
뮤지컬을 보기로 했다. 지금까지의 여정에서 많은 것들이 싫거나 힘들면 접어두는 형태의 옵션이었다면 뮤지컬은 필수였다. 이 곳에서 상연 중인 뮤지컬을 나중에 한국에서 관람할 수도 있겠지만 뮤지컬로 가득한 웨스트엔드에서 꼭 보고 싶었다. 똑같은 음식도 어느 곳에서 먹느냐에 따라 천양지차의 맛이 나듯 런던에서의 뮤지컬 또한 그곳에서 꼭 보아야 하는 것 중의 하나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일요일에 상연하는 뮤지컬은 수가 많지 않았다. 몇 개 안 되는 것 중에 ‘라이온 킹’을 골랐다. 애니메이션으로 무척 유명한 작품이지만 본 적은 없었다. 아내는 애니메이션을 재밌게 봤다고 기대된다고 했다. 줄을 서서 표를 샀다. 적지 않은 가격이었지만 부담감보다는 기대감이 컸다. 2시 30분 공연이라 3시간이 좀 넘게 여유시간이 생겼다.
베이커 스트리트 221b. 셜록 홈즈의 사무실로 향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90년대 초반 추리소설이 나름 인기였다. 초등학생이었던 나 역시 홈즈에 열광하며 그가 등장하는 작품을 열심히 읽었다. 최근의 영국 드라마 ‘셜록’ 또한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재밌게 보았다. 실제가 아님을 알고 있지만, 좋아하는 이야기의 장소를 그것도 외국에서라면 꼭 방문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셜록 홈즈 박물관과 기념품 가게로 쓰이는 베이커가 221b는 사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래도 이 곳에 온 것이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 이야기를 현실에서 목격하고 있다는 기분에 즐거웠다. 다른 많은 사람들 또한 이야기에 취한 듯 이 곳을 방문하는 것 같았다.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야기를 담고 있는 형식은 사람마다 선호하는 형태가 다양하겠지만, 이야기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사실 본인의 삶에 직접적으로 상관없을 것이 분명함에도,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드는 이야기를 본능적으로 찾아다닌다. 이야기에 대한 본능적 열망은 인간이 꿈꾸는 존재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탁월한 관찰력과 뛰어난 추리력의 홈즈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일지 몰라도 누군가의 머릿속에서는 살아 움직인다. 어떤 이는 가상의 상황에서 그에게 감정 이입하는 것으로 또 다른 이는 부족하나마 현실에서 그와 비슷하게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사람들 각자의 꿈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런 이야기에 대한 열망이 런던에서는 뮤지컬은 필수라는 생각을 낳게 했나 보다. 약간은 흥분된 기분으로 ‘라이온 킹’을 감상했다. 사실 동물들의 이야기여서 동물의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지가 가장 궁금했다. 다채로운 가면과 정교한 무대 구성 그리고 순간순간 동물들의 특성을 몸으로 표현하는 배우들은 말 그대로 놀라웠다. 입체적으로 펼쳐지는 정글과 동물들은 무대를 새로운 공간으로 만들어냈다. 실제 목격할 수 있는 정글과는 다른 그리고 화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정글과도 다른, 제3의 정글이 눈앞에 펼쳐졌다.
세 시간에 가까운 시간이 거침없이 지나갔다. 아내는 첫 장면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기쁨이나 슬픔의 감정이 아닌 그저 감격적인 마음에 눈물이 났다고 했다. 이야기의 구조만 놓고 보면 무척이나 단순함에도 이를 입체적으로 담아낸 힘이 강렬함으로 다가왔다.
이야기의 위력은 다른 곳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다음날 프랑스로 떠나는 유로스타를 타기 위해 방문한 세인트 판크라스 역(St. Pancras). 그 역과 마주하고 있는 킹스크로스 역(King's Cross)은 해리 포터에 등장하는 곳이다. 마법학교 호그와트로 향하는 기차를 탈 수 있는 9와 3/4 플랫폼은 눈앞에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도리 휘날리며 벽으로 돌진하는 해리 포터가 되고 싶어 했다. 해리 포터가 될 수 없지만 그와 같은 모습으로 사진 한 장 찍는 것은 이후에도 기억될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누군가는 반가운 마음에 해리 포터를 다시 읽게 될 것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누군가에게는 소설과 다름없을 여행 이야기가 이제 끝나간다. 누군가의 꿈이었을 홈즈와 심바(‘라이온 킹’ 주인공) 그리고 해리 포터처럼, 여행 끝에 새롭게 시작될 내 이야기가 누군가의 꿈이 되었으면 좋겠다. 거창하거나 화려하지 않아도 잔잔한 미소가 어리는 모습으로 쓰여져야 할 텐데. 아직까지도 아마 앞으로도 계속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