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용원 Nov 21. 2015

파리 #2
-많은 그림, 많은 사람, 많은 정답-

여행, 기록 그리고 출발

시차와 피곤함이 겹친 덕분에 식사와 산책 후 나와 와이프는 숙소로 들어왔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에 들었다. 거의 12시간 가까이 잠들었다가 일어났다. 아침을 먹으려고 와이프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숙소 밖을 나서서 열 걸음쯤 걸었을까 갓 구운 빵 냄새가 났다. 냄새를 찾아 들어간 빵집에도 역시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언어는 없었다. 그래도 띄엄띄엄 읽는 영어식 프랑스어 읽기와 수신호로 몇 가지 빵 종류를 고를 수 있었다. 따뜻한 빵으로 배를 채운 뒤 와이프와 나는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향했다.     


그림을 본다는 건 사실 힘든 일이다. 더욱이 나같이 그림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도 없는 사람에게 하나의 그림을 본다는 것은 때때로 머리에 쥐가 날 만큼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끔 그림을 보러 간다. 모든 그림이 그렇지는 않지만 간혹 내  마음속을 잔잔히 흔들어 놓는 그림들이 있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심지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조차 짐작할 수 없는 그림들도 많지만, 때때로는 몇몇의 그림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게 된다. 이걸 그린 화가는 나에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어떤 느낌이었기에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말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림과 나는 간혹 이런 식의 무언의 대화를 나눈다. 


어이없어 보이지만 이 대화가 재밌는 이유는 결국 이 대화의 주제가 나 자신이라는 점이다. 간혹 엄청나게 유명하고 누구나 다 알만한 그림들 앞에 서면 나 역시 정신없이 그림을 바라보지만, 그런 그림과 대화가 일어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오히려 이름도 모르는 어떤 화가의 그림, 누군가의 컬렉션에 포함되어 있어서 엉겁결에 같이 전시되었을 것 같은 혹은 당시나 지금이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한 켠에서 소외받고 있는 누군가의 그림 한 점과 대화를 나누는 경우가 많다. 그 대화를 나중에 곱씹어보면 현재 나 자신의 고민거리와 마음 상태를 드러낸 것이 대부분이다. 결국 일상 속에 묻혀있던 내가, 그림이라는 거울로 나 스스로를 확인하는 것이다. 당연하게 생각하던 ‘나’에 대해서 나조차도 모르고 지낸다는 건 너무 어이없지만, 너무 많은 것을 보아야 하고 고민해야 하고 결정해야 하는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그림을 보는 것이 어렵고 힘들지만 재미있다.


오랑주리 미술관은 매우 아담한 규모다. 우리가 갔을 때는 개관한지도 얼마 안 되는 시간이라 관람객들도 많지 않았다. 여유롭게 그림 몇 점을 감상하니 타원형의 방에 들어섰다. 모네의 ‘수련’이었다. 가만히 보았다. 가만히 볼 수 있었다. 숨죽인 채 벽면을 휘감고 있는 그림에 시선을 마주했다. 가운데 마련된 타원형 배열의 벤치에 앉아 더 천천히 살펴볼 수 있었다. 시시 때때 변화한 자연을 그린 것이기에 같은 것을 그렸음에도 다른 표현이었다. 누가 봐도 걸작이라 할 그림이었다. 나 자신과의 대화 같은 건 없었지만, 고요한 분위기에서 볼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이어서 오르세 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번쯤 들어보았을, 한 번쯤 들었다고 믿을법한 유명한 그림들이 눈을 돌리는 곳마다 나타났다. 사실 그 그림들보다 놀라웠던 건 미술관의 형태였다. 기차역을 개조해 만들었다는 사실은 진작 들었었지만, 그러한 사실보다도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미술관의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복도에 전시되어 있는 조형물과 그 사이에 길쭉하게 놓여 있는 벤치들 그리고 누군가는 무심하게 누군가는 열심히, 이야기하고 스케치하는 광경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좋았다. 보통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여유롭게 널브러져 있는 공간을 찾기는 쉽지 않다. 때때로 그림을 보고 나면 온몸의 진이 다 빠진 것처럼 힘이 없고 머리가 아파온다. 가뜩이나 아는 게 없는데 의미를 찾고 공감하겠다고 머리를 사방으로 굴려서인 것 같다. 그럴  때마다 아쉬운 것이 늘어져 있는 공간이었는데, 오르세에서는 그게 가능했다. 


하지만 정해놓은 시간, 수많은 그림들 그리고 스쳐보기라도 하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그림을 감상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틈을 넉넉하게 주지 않았다. 이것을 했으니 저것을 해야 하고, 그것이 중요하니 그것을 하고 그리고는 또(혹은 더) 중요한  그다음 것을 해야 하고...... 사실  그중에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일도 많다. 수많은 고민거리 중에 생존 혹은 더 나은 삶에 필수조건이 아닌 경우가 얼마나 많을까? 물론 고민이 많다는 것 자체가 나쁘다거나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고민이 많고 욕심이 많아서 무엇인가를 더 하고 싶어 하고 이루려 하는 것은 분명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낼 수 있다. 문제는 그러한 것들 중에 순전히 자기 자신이 원하지 않는 더 나아가 하고 싶지 않은 수많은 사항이 포함될 수 있다는 점이다. 쳇바퀴를 굴리다 보니 더 이상 굴리지 않으면 죽는다는 결론은 누구도 정답이라고 자신할 수 없는 답이다. 바퀴를 굴리다가 멈출 수도, 천천히 굴릴 수도, 빨리 굴릴 수도 있다. 하나의 결론이 정답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신이 가져다 준 것일까?      

매거진의 이전글 파리 #1 -적응의 시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