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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원 Mar 11. 2016

알파고 앞에서 인간성을 외치다

기계가 정복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바둑에서 인간이 패배했다. 아직 대국이 세 번 남아있지만 인간 대표로 나선 이세돌을 상대로 알파고는 2연승을 거두었다. 특히 제2국은 이세돌의 큰 실수가 없는 가운데 알파고가 승리한 상황이라 사람들의 충격은 더욱 크다.     


벌써부터 일각에서는 인공지능을 갖춘 기계에 인간이 정복당하는 영화 ‘터미네이터’나 ‘매트릭스’ 식의 디스토피아를 예측하기도 한다. 또한 현실적으로는 인간이 수행한 많은 노동을 기계가 대체함에 따라 많은 직업군이 사라지고 대량 실업 사태가 도래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이러한 예측은 많은 사람들에게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고민을 안겨주고 있다. 사실 그 고민의 중심에는 일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보다는 소득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크게 깔려 있다.      


무(無) 소득에 대한 두려움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본적인 생존뿐만 아니라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에 있어서도 경제적 가치가 큰 몫을 차지한다. 특히 한국 사회는 누군가가 얼마나 버는지가 정말 중요하게 인식되는 사회이다. 그렇다면 소득을 얻지 못하는 인간은 존재 가치가 없는 것인가? 이 섬뜩한 질문에 쉽게 ‘예’라고 답할 사람은 없겠지만 ‘아니오’라고 강하게 외칠 수 있는 사람이 한국 사회에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인간의 크고 작은 노동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을 기계의 등장을 인간이 위기로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가치를 사용가치 즉 숫자로만 판단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인간은 최고로 극대화된 생산성이라는 잣대로 스스로의 가치를 평가하고 있다.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어떠한 숫자의 결과를 낳느냐가 중요한 세상이다. 특히 한국 사회는 더 많은 결과와 더 효율적인 결과라는 이유로 인간 스스로를 기계처럼 움직이게 하는 것이 거부할 수 없는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기계와 달리 인간은 실수도 하고 휴식도 필요한 존재다. 경제적 가치를 만들어낸다는 측면에서 휴식과 실수가 없는 기계를 인간은 이길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알파고와 같은 존재의 등장은 영화 ‘매트릭스’처럼 인간을 연료로 사용하는 사태의 첫 발일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의 삶이 지금처럼 경제적 가치라는 숫자가 아닌, 행복이라는 계량적으로 환원하기 어려운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면 인공지능 기계의 등장은 축복이다. 인간이 노동을 통해 얻는 가장 큰 혜택은 경제적 가치이다. 그러한 인간의 노동을 기계로 대부분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은, 삶의 모습들을 지금과는 다르게 스스로의 행복을 위한 활동으로 구성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그러한 가능성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단적인 예로, 청소년들에게 선호가 높은 장래희망이 안정적으로 경제적 가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공무원과 건물주라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더욱 서글픈 것은 이러한 생각이 청소년만이 가지는 생각이 아니라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다수가 품고 있을 생각이라는 점이다.      


경제적 가치의 극대화로 인간을 판단하는 경향이 한국 사회에 강해질수록 인공지능 기계의 공격은 더욱 거세게 다가올 것이다. 동일한 능력이라면 기계와 인간 중 노동에 적합한 것은 평가 기준이 비용이든 효율성이든 기계일 것이다. 인간 노동 현장에 기계의 전면적 등장이 가까워 올수록, 높은 숫자만을 목표로 보고 달려온 한국 사회에서 인간성과 인간 가치에 대한 고민은 필수적이어야 한다. 인간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부정하는 현상을 막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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