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뜬 자들의 도시]를 읽고
20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났다. 각종 미디어에 선거 이슈가 도배되던 때, 문득 예전에 읽었던 책 한 권이 떠올랐다. 시각이라는 인간의 결정적인 감각의 상실이 가져오는 날것의 느낌을 충격적으로 그려낸 『눈먼 자들의 도시』를 썼던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뜬 자들의 도시』.
이 책은 전작 『눈먼 자들의 도시』 의 집단 실명 현상 4년 이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수도에서 치러진 지방선거는 선거 초반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높은 투표율을 기록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투표의 70% 이상이 백지투표인 현상이 발생한다. 일주일 후 이루어진 재투표에서는 백지투표의 비율이 80% 이상으로 상승하게 된다.
선택할 수 있는 답이 정해져 있는 객관식 문제 앞에서 답을 표시하지 않는 것은 문제를 틀리겠다는 의지이다. 이러한 오답의 의지는 사실 답을 틀리겠다는 의사표시이기 보다는 주어진 선택지 중에 답이 없다는 표시에 가깝다. 특히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선거라면 백지응답은 주어진 선택지 모두가 싫다는 표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속의 집권세력은 백지투표를 조직적인 정권 붕괴의 시도로 해석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배후세력을 색출하려 하고, 백지투표를 한 것으로 여겨지는 대부분의 시민들을 혼란에 빠뜨려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드러내려고 한다.
하지만 계속되는 여러 시도에도 배후세력은 찾아낼 수 없었고 집권세력은 초조해져 간다. 그러다 4년 전 모두가 눈먼 도시에서 유일하게 눈뜬 이가 있었다는 제보가 집권세력에게 들어온다. 모두 눈 감고 있을 때 눈을 뜨고 있었던 이유만으로 아무런 연관이 없는 희생양이 되어버린 인물에 대한 권력의 행동들은, 무참할 정도로 서늘한 엔딩을 보여주며 소설의 끝을 정리한다.
총선과 이 책이 연결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백지투표 때문이다. 누군지도 모르는 인물들이 등장한 가운데에서 누군가를 선택해야 할 것을 강요받는 투표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해야 할 이유가 없는 행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라는 행위가 의미를 가지는 것은 투표를 통해 선출된 대표들이 생존의 규칙들을 정하고 변화시키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선거에서 이루어지는 백지투표는 사실 선택지로 주어진 인물 혹은 정당이 시민들의 선호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에서 투표는 사실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시민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다. 덕분에 선거 때마다 투표에 대한 독려 운동은 끊이지 않지만, 정작 그러한 선거가 진정으로 사람들의 정치적 선택을 반영하는지 그리고 그렇지 않다면 어떤 식의 시도가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잘 다루어지지 않았다.
사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가 사람들의 생각을 진정으로 잘 반영해 행동한다면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한국의 현실에서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신뢰도는 비교대상이 없을 만큼 낮은 상황이다.
이번 20대 총선의 결과로 집권세력은 심판을 받았고 야권은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그러나 진정 1번의 대안으로 2,3번이 선택되었는지 그리고 그 이전의 선거에서도 진정 대안으로써 지금의 집권세력이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차마 『눈뜬 자들의 도시』의 사람들처럼 백지투표를 할 수 없었기에 나온 결론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삶을 추상적 혹은 실질적 수준에서 결정하는 것이 정치라면 그에 대한 크고 작은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너무나 명확하게도 사람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빡빡한 일상 덕분에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 현실적 한계라면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보통 사람들이 아닌 선출된 대표들이 해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이번 선거에서 선출된 대표가 유권자들이 백지를 낼 수 없기에 선택한 것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사실 『눈뜬 자들의 도시』는 독해가 쉽지 않다. 라틴 문학 특유의 마구잡이로 늘어놓는 문장들은 집중력을 갉아먹기에 최적의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독서의 흐름을 쉽게 끊어지도록 만든다. 게다가 정치라는 소재는 전작 『눈먼 자들의 도시』와 같은 생생한 묘사와 날것 그대로의 재미 대신 다소 지루한 느낌을 안겨 준다. 하지만 이십 년 가까운 시간을 정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다 문학을 쓰기 시작해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작가 사라마구의 삶을 감안한다면, 이 책은 분명 읽어볼 가치가 있다. 정치가 우리의 삶과는 전혀 관련 없는 딴 세상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져도, 사실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기에 반드시 고민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