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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원 Aug 10. 2016

여기 행복한 청년은 있습니까?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을 읽고

무슨 색깔의 수저를 물고 태어났느냐에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는 그곳. 세상을 창조한다는 조물주보다도 위에 있다는 건물주가 존재하는 그곳. 용이 나왔다던 그 개천은 이미 말라버렸다는 그곳.


높은 청년실업률, 높은 집값, 학자금으로 시작된 청년의 대출은 주거를 위한 대출로 모습을 바꿔간다. 삶을 살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인지, 돈을 벌기 위해 삶을 사는 것인지조차 구분하기 애매한 순간들이 스쳐 지나간다. 


엄혹한 사회 현실에 혹자는 청년들이 과감하게 행동하라 하고 혹자는 청년들에게 몇십 년 전 청년들과 같은 투지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등장하는 정책은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을 일회용품 같은 비정규직 일자리의 양산인 것만 같다. 


이러한 청년의 답답한 현실이 한국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한국과 유사한 정확히는 한국보다 한 발 앞서 발전과 문제 상황을 겪고 있는 일본에서는 너무나 심각해야 할 청년들이 ‘행복’하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출처 : 다음]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에서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와 아울러 젊은이들이 행복해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요즘 일본 젊은이들의 ‘생활 만족도’나 ‘행복도’는 근래 40년 동안 보여 준 수치 중 거의 최고치를 보이고 있다. ‘격차사회다.’, ‘비정규직 고용이 증가했다.’, ‘세대 간의 격차가 심하다.’ 등과 같은 비관적인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당사자인 젊은이들은 지금 ‘행복하다.’라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봐도 신기하다. 사회에는 부정적인 전망이 넘쳐나는데 왜 당사자는 행복하다고 느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실제 젊은이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포착하고 관찰하면서 저자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자신이 ‘이보다 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됐을 때, “지금 행복하다.” 혹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다.”라고 대답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일본의 경우 프리터 즉 아르바이트로 어느 정도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삶에 대한 인식 또한 많이 부정적이지 않다. 돈을 많이 벌고 집을 사고 해외여행을 하고 고급 취미 생활을 즐길 수 없다는 것이 행복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삶의 소소한 것에서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기성세대들의 눈에는 그러한 삶의 자세가 체념으로 보이겠지만 청년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무조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사람이 밥만 먹고살 수 없듯 저자는 소소한 행복을 구성하는 요소로 ‘현실 만족’과 함께 다른 것을 꼽고 있다. 바로 ‘친구’다. 


사실 이 책과 관련해 더 이상 고속 성장하지 않는 일본 경제 상황에 체념해 청년들이 마침내 득도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많은 이들이 생각하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들이 득도할 수 있었고 행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친구’의 존재다. 


1990년대 이후 현저하게 눈에 띄는 점은 젊은이들에게 있어 ‘친구’나 ‘동료’의 존재감이 매우 커졌다는 사실이다. 내각부에서 실시하는 「국민 생활 선호도 조사」를 보면, 설문지는 국민들에게 ‘행복도’와 ‘행복도’를 판단할 때 중시한 사항’에 대해 묻고 있다. 이 중 15세부터 29세 사이의 젊은이들 가운데 60.4%에 이르는 젊은이가 ‘친구 관계’라고 답했다. 이 결과는 다른 세대와 비교해 봐도 월등히 높은 수치였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의 중요성은 사회에 참여하는 젊은이들을 관찰하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왜 통계적으로는 사회 공헌을 희망하는 젊은이의 수가 증가 추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의 수는 그만큼 증가하지 않는 것일까? 왜 젊은이들의 투표율은 감소 추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것은 일상의 답답함을 깨뜨려 줄 만한 매력적이고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출구’를 좀처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론 조사를 보면, ‘사회’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가 꾸준히 증가하는데도 어째서 실제로 행동하는 젊은이는 적었던 것일까? 왜냐 하면, 그들과 ‘사회’를 이어 주는 회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노동 문제라는 ‘사회성’이 함축된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마음 둘 곳’이나 ‘상호 승인’인 것으로 보인다. 


흔히 득도한 청년들이 사회에 만족해서 무관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편견을 통계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동시에 사회 변화를 위한 활동이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의 핵심을 재미로 찾으면서 그 단초를 묵시적으로는 관계 맺음에서 발견하고 있다. 


즉 일본의 젊은이들은 아르바이트를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편의점의 도시락을 먹고 SPA 브랜드에서 쇼핑을 하며 지하철로 데이트를 할 수밖에 없어도, 함께 할 친구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필자의 고민이 시작한 지점이기도 하다. OECD에서 발표한 2016년 더 나은 삶의 지수 부문의 어려울 때 부를 친지나 친구의 존재 유무를 확인하는 질문에 대한 통계를 살펴보자. 한국은 76%로 전체 39개국 중 38위를 차지했다. (일본은 91%로 18위를 차지했다.)


사실 굳이 통계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이미 한국 사회가 각자도생의 사회로 흘러가고 있음은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초등학생도, 대기업을 다니는 청년도, 직장맘도 그저 외롭고 외로울 뿐이다.(각자도생 사회... 무너지는 인간관계...‘이 된 사람들경향신문, 2016-02-26)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경쟁’이라는 단어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한국의 현실 속에 ‘친구’라는 존재는 사치일지도 모르겠다. 당장의 필요와 소용도 없고 그렇다고 무엇인가 금전적인 이익을 안겨주는 것도 아닌 존재의 부재. 한국의 청년을 이 책의 제목처럼 표현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두렵기까지 하다.


혹자는 한국과는 다른 상황이라고 혹은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책이지만, 청년 문제를 고민한다면 한 번쯤 읽어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사람 살아가는 일에 정답이 있는 경우가 없듯이 모든 시작은 고민과 탐구에서 시작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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