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물결]을 읽고
인간은 언제나 ‘다음’ 순간을 걱정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예측은 누구나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다음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멈추지 않고 쌓여가는 ‘지금’이라는 순간들을 지나치다 보면, 어느 순간 ‘과거’가 만들어져 있고 눈앞의 변화된 현실에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경험하는 상황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밑 빠진 독에 물 빠져나가듯 지나가는 ‘현재’의 상황에서 ‘과거’의 선택을 곱씹어보고 아쉬워하는 일은 사실 누구나 경험하는 흔한 일이다. 그러한 아쉬움과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미래’를 예측하려 한다.
프랑스의 세계적인 석학인 자크 아탈리가 쓴 ‘미래의 물결’ 또한 그러한 책이다. 사실 모든 미래에 대한 예측이 과거에 대한 이해와 분석에서 출발하겠지만 이 책이 다른 소위 ‘미래학’ 책과 구별되는 점은 상상력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를 개관한 후, 미국 중심의 현 체제 이후 하이퍼 제국 → 하이퍼 분쟁 → 하이퍼 민주주의의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일반적인 미래의 예측이 수십 년 수준의 것이라면, 아탈리는 그러한 시간의 한계를 넘어 과거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자신의 상상력을 덧대어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하이퍼 민주주의의 시대를 주도한다는 ‘트랜스휴먼’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읽어보면 필자의 이러한 지적이 이해가 될 것이다.
트랜스휴먼 각자는 이타적인 지구 시민이며, 유목민인 동시에 정착민이고, 권리와 의무에 있어서 자기 이웃과 동등하고, 세계에 대해서 호의적이며 자기 아닌 타인을 존중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희소성이 지배하는 세계, 즉 시장에서 타인은 언제나 경쟁 상대였다. 하지만 트랜스휴먼에게 타인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동시에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게 해 주는 존재다.
트랜스휴먼들에 의해서 타인과의 경쟁을 종용하는 시장경제와 병행해서, 서로가 지는 재능을 무료로 교환하거나 대중을 위한 공공 서비스 등이 무료로 제공되는 이타적인 경제가 자리 잡게 될 것이다. 내가 관계의 경제라고 부르는 이 같은 형태의 경제는 희소성의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 가령 지식은 나누어 준다고 해서 그 지식을 주는 사람의 지식이 줄어들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회자되는 공유경제와 비슷한 형태로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자신의 것을 무료로 공유하는 것을 넘어, 지금의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인간형의 모습이 새로운 시대를 주도하게 될 것이라는 저자의 생각은 지금의 상식을 뛰어넘는다.
그러나 저자의 이러한 상상력은 역사에 대한 이해와 현실에 대한 분석에서 등장한 것이기에 꿈과 같은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개관하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이렇듯 세상이 바뀌는 방식은 언제나 같다. 상업적 공간이 점진적으로 확대되고, 그에 따라 산업화의 장도 넓어지고, 이렇게 되면 금융과 기술이 따라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역학에 따라 새로운 부류의 창조적 계급, 즉 자유로우면서도 통제적인 집단이 광대한 농지와 해양 산업지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현대적인 항구도시에서 해군력과 상선들을 지휘해서 권력을 잡게 된다. 이들은 금융가, 선박 제조업자, 상인, 혁신가, 모험가들을 도시로 끌어들인다. 이 도식에 따르면, 서서히 봉급생활자들의 권익이 향상되며 강제 노동은 사라진다. 또한 천연자원과 시장은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관리된다.
팽창 지향적이고 과도하며, 무제한적이고 통제 불능인 미국 금융체제는 이미 산업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수익성을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산업체들은 벌어들인 돈을 다시금 자사에 투자하기보다 금융 부문에 투자해서 높은 수익을 올리려고 한다.
기나긴 인류의 역사는 몇 가지 아주 단순한 법칙을 따르고 있다. 민주주의와 시장이 출현한 이래로 모든 진화는 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요컨대 세기를 거듭할수록 정치적 자유가 일반화되며, 욕망이 상업화한다는 사실이다. 세기를 거듭할수록 농부들은 도시로 이주한다. 세기를 거듭할수록 시장민주주의의 총집합체는 하나의 임시 ‘거점’을 중심으로 하여 점점 더 거대해지는 하나의 시장으로 모여든다. 상업 세계의 세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서 ‘거점’이 되기를 원하는 도시 또는 지역은 당대에서 가장 거대한 통신망의 중심이 되어야 하며, 거대한 농업·제조업 배후지를 확보해야 한다. ‘거점’은 새로운 창조적 계급이 제안하는 프로젝트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충분히 제공할 수 있을 정도로 실권 있는 은행기관을 설립할 수 있어야 하며, 신기술을 이용하여 당대에 가장 복잡하고 성가시다고 여겨지는 서비스를 대량생산 가능한 상품으로 제조해낼 수 있어야 한다. ‘거점’은 또한 정치·사회·문화·군사적인 면에서 적대적인 소수자들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하며, 통신망과 원자재들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덧붙여 이 책이 쓰인 2006년(한국 출판은 2007년) 당시 저자는 2008년 금융위기의 전조를 이미 느끼고 있었음을 지면에서 드러내고 있다. 미국의 주택금융시장에 대한 우려를 내보이며 모기지 금융회사인 페니매와 프레디맥의 위기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은 모든 일이 일어난 지금 읽어도 소름이 돋는다.
사실 이런 책을 주로 읽거나 읽으려고 하는 혹은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 다수의 특징은 ‘미래가 어떠하다’라는 것을 알고자 하는 열망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알아낸 미래를 바탕으로 세상의 변화에 대응하고 소위 말하는 ‘승리자’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미래가 어떠하다는 결론이 아니라 어떻게 이러한 결론이 나왔느냐이다. 지금도 지나쳐 가고 있는 ‘지금’이라는 시간들의 다양한 모습이 미래를 정말 예상하지도 못 한 것으로 바꾸어 버릴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한국의 사람들이 속도에 집착하고 있다. 인간의 수명은 계속 늘어난다고 하는데 빠른 결론과 빠른 실행은 고민이라는 말 자체를 지워버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미래 또한 정해져 있으니 빨리 알아
채고 대응하라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묘하게도 거의 십 년 전에 한국어판 출판에 맞추어, 아탈리가 쓴 한국의 미래에 대한 언급은 고민하는 힘의 위력을 보여준다.
함께 운명을 짊어지겠다는 공동체 의식은 한국이 지닌 대단한 강점 중의 하나다. 한국의 놀라운 경제적 도약은 반세기 가량 이어진 일본의 강점, 동족끼리 총부리를 들이댄 전쟁의 비극에서 비롯된, 가난과 열강들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집단적인 욕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한국 사회의 가장 큰 걱정거리인 사회적 불평등의 가속화로 말미암아 이 같은 힘은 점차 약화되고 있다.
어쩌면 지금의 한국을 지배하는 ‘수저론’과 ‘헬조선’이 그의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 또 한 번 소름이 돋는다.
촘촘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거침없는 상상력이 펼쳐지는 미래가 궁금한 분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개인적으로는 미래에 대한 예측만큼이나 지금까지의 역사에 대한 개괄적 서술 부분에 대한 정독을 추천하고 싶다. ‘지금’이든 ‘미래’든 결국 쌓여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