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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원 Nov 28. 2015

파리 #4
-스테인드글라스 아래에서의 불통-

여행, 기록 그리고 출발

내일이면 파리를 떠난다. 유럽에 오고 파리에 머문 지 나흘 만에 파리 시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와이프가 많이 보고 싶어 했던 노트르담 성당으로 향했다. 파리 노트르담 성당은 스테인드글라스가 유명하다. 



지금이야 유리창이 없는 집이나 건물을 상상할 수 없지만, 유리는 사실 무척이나 귀한 건축자재였다. 유리의 가장 큰 장점은 햇빛을 건물 내로 들어오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인식하는 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힘이 시각이라는 점에서,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둠은 사실상 잠 이외의 활동을 허락하지 않는 상태이다. 특히나 신과 맞닿을 수 있는 특별한 공간에서 유일한 밝음으로 인식되는 스테인드글라스는,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거룩한 빛으로 인식되었을까? 


이 공간의 빛을 통제하는 것과 관련해 한편 드는 생각은, 실질적으로 이 곳을 지배했을 당시의 성직자들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다행히도 대부분의 보편적인 종교는 정의롭지 않은 원칙을 가지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교리의 범위에서 행동하는 일반적인 성직자들이 교리와 어긋나게 사람들을 괴롭히는 경우는 흔치 않았을 것이다. 물론 역사 속의 여러 예들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지는 않아도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명백한 것은 당시의 성직자들이 신의 대리인 혹은 매개자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가지는 권위가 어마어마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모든 삼라만상을 제어하는 신의 뜻을 전달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토론, 협의, 비판도 제기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당장의 생존을 위해서는 신의 뜻에 따라 이번 가을의 추수가 어떠할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하면 얼마나 맞는 말로 받아들일까? 아마 신의 존재에서부터 시작해서 매우 넓은 스펙트럼의 비판이 제기될 것이다. 그만큼 시간이 흘렀고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지평도 확대됐다. 누군가가 절대적으로 옳다는 이야기는 절대적으로 틀린 이야기라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 되었다. 사실 그런 다양한 생각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을 계속해서 생존하고 발전하게 만들어준 힘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노트르담 성당의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아래에서, 오래전에 이루어지고 멈춘 ‘내가 옳으니 다른 이야기는 듣지 않겠다’라는 행동이, 내가 태어나고 살아간 공간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느껴야 할까? 설마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가 신의 대리자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아니면 거의 비슷하게 생각을 하고 있기에 그럴 수 있는 것인가?  



에펠탑은 언제 보아도 좋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십 년 전 처음 보았을 때도 그저 보고 있는 게 이상하게 좋았다. 그냥 외국에 있는 크고 멋진 건축물 이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어떤 사람, 물건이 좋아지는 것처럼 에펠탑은 나에게 그냥 좋은 건축물이다. 그냥 주변에 앉아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유럽여행의 첫 번째 일정이 그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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