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마음이 답답하고 힘이 부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뾰족한 답을 내놓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그저 속만 끓이는 상황. 사실 어지간한 일에는 그저 '허허' 해버리는 성격 탓인지 살면서 그런 순간들을 많이 겪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그리고 이 글을 읽을 혹은 읽지 않을 누군가에게도 그런 순간은 항상 존재해왔던 것 같다.
그런 순간이 찾아올 때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무엇인가 해왔다. 여행을 하든, 글을 쓰든, 술을 마시든, 격하게 운동을 하든.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그런 순간이 찾아올 때 예전처럼 그 무엇인가를 하기가 쉽지 않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른바 현실적인 상황들인 시간, 돈, 그리고 기타 등등의 여건들 때문에. 그 때문일까? 마음이 잘게 잘게 계속해서 부서지는 날이 올 때면 나를 달래줄 책을 찾는 게 자연스러워졌다(물론 그런 책들의 다수는 예전에도 읽었던 책들이다).
[그리스인 조르바] 역시 그러한 책이다. 이번의 독서로 세 번쯤 아니 네 번쯤 읽은 것 같은 이 책은, 나에게는 인생 속에서 만날 각종 가시덤불을 무척이나 아파하면서도 기운 좋게 짓밟으며 걸어갈 수 있게 만드는 책이다. 이 책의 줄거리는 어떻게 보면 단순하다. 주인공이 '조르바'라는 인물을 만나 함께 지내는 것을 다룬 것이 전부다. 물론 그 속에는 여러 사건들이 있지만 핵심은 주인공과 조르바의 만남과 함께함이다.
전형적인 지식인으로 규정할 수 있는 주인공과 '책'으로 표현되는 지식과는 단 하나의 연결점도 찾을 수 없는 어찌 보면 날것 그 자체와도 같은 조르바라는 인물이 동거 동락하는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특히 수많은 책을 파먹고 자신의 이상과 추상으로 세계를 규정하는 주인공이 '살아있음' 그 자체인 조르바와의 만남을 통해 삶과 세계를 새롭게 규정하게 되는 모습들은 '인생에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주는 느낌이다.
처음 주인공이 조르바와 만났을 때 나누었던 대화의 일부다.
조르바 : 그러나 처음부터 분명히 말해 놓겠는데, 마음이 내켜야 해요.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주인공 :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조르바 : 자유라는 거지!
살아있음 그 자체인 조르바와 함께 사업을 시작한 주인공은 자신을 짓눌러왔던 고민의 실체에 대해 구체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한다.
다른 정열, 보다 고상한 정열에 사로잡히기 위해 쏟아 왔던 정열을 버리는 것. 그러나 그것 역시 일종의 노예근성이 아닐까? 이상이나 종족이나 하느님을 위해 자기를 희생시키는 것은? 따르는 전형이 고상하면 고상할수록 우리가 묶이는 노예의 사슬이 길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좀 더 넓은 경기장에서 찧고 까불다가 그 사슬을 벗어나 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건 무엇일까?
붓다에서 벗어나고 모든 형이상학적 근심인 언어에서 나 자신을 끌어내고 헛된 염려에서 내 마음을 해방시킬 것. 지금 이 순간부터 인간과 직접적이고도 확실한 접촉을 가질 것.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타파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폐허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 그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생각했다.......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낡은 세계는 확실하고 구체적이다. 우리는 그 세계를 살며 순간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 그 세계는 존재한다. 미래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 보랏빛 바람(사랑, 증오, 상상력, 행운, 하느님)에 둘러싸인 구름...... 이 땅의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라도 이제는 암호 이상의 예언을 들려줄 수 없다. 암호가 모호할수록 선지자는 위대한 것이다.
나는 어느 날 아침에 본, 나뭇등걸에 붙어 있던 나비의 번데기를 떠올렸다. 나비는 번데기에다 구멍을 뚫고 나올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기다렸지만 오래 걸릴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입김으로 데워 주었다. 열심히 데워 준 덕분에 기적은 생명보다 빠른 속도로 내 눈앞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집이 열리면서 나비가 천천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날개를 뒤로 접으며 구겨지는 나비를 본 순간의 공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엾은 나비는 그 날개를 펴려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나는 내 입김으로 나비를 도우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번데기에서 나와 날개를 펴는 것은 태양 아래서 천천히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때늦은 다음이었다. 내 입김은 때가 되기도 전에 나비를 날개가 쭈그러진 채 집을 나서게 한 것이었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 뒤 내 손바닥 위에서 죽어 갔다.
아래 대목은 이 책과 관련해 많이 인용되고, 실제 필자도 가장 좋아하는 부분 중의 하나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해변을 따라 마을로 향했다. 내 심장은 가슴속에서 뛰고 있었다. 내 생애 그 같은 기쁨은 누려 본 적이 없었다. 예사 기쁨이 아닌, 숭고하면서도 이상야릇한, 설명할 수 없는 즐거움 같은 것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설명할 수 있는 모든 것과 극을 이루는 그런 것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돈, 사람, 고가선, 수레를 모두 잃었다. 우리는 조그만 항구를 만들었지만 수출할 물건이 없었다. 깡그리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그렇다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엄청나게 복잡한 필연의 미궁에 들어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놀고 있는 걸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놀았다.
모든 것이 어긋났을 때, 자신의 영혼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그 인내와 용기를 시험해 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보이지 않는 강력한 적(혹자는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혹자는 악마라고 부르는)이 우리를 쳐부수려고 달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부서지지 않았다.
외부적으로는 참패했으면서도 속으로는 정복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인간은 더할 나위 없는 긍지와 환희를 느끼는 법이다. 외부적인 파멸은 지고의 행복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완전히 망해버린 상황 속에서 춤추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 사실 인간에게 자유란 1차적으로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이겠지만 결국 자신을 갉아먹는 수많은 상황 속에서도 꺾이지 않을 자유가 아닐까?
그리고 조르바는 자신만의 특유의 언어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 두니까. 이러니 줄을 자를 수 없지요. 아니, 아니야! 더 붙잡아 맬 뿐이지...... 이 잡것이! 줄을 놓쳐 버리면 머리라는 이 병신은 그만 허둥지둥합니다. 그러면 끝나는 거지. 그러나 인간이 이 줄을 자르지 않을 바에야 살맛이 뭐 나겠어요?
사실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살아있기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이다. 늘 함께하고 있어 인식하지 못하는 공기의 존재처럼, 인간에게 삶은 끝나기 전까지는 혹은 끝날 것이라는 위험이 목전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조르바의 말처럼 계속해서 계산한다. 조금 더 나은 혹은 최적을 위한 선택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지내다 보면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내가 이것을 원해서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것을 하게 되어서 하고 있는 것인지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삶은 늘 당연한 것이기에, 어제와 지금과 이어질 내일은 크게 다르지 않기에 그 속에서 아등바등 '최적'을 찾는 것이다. '최적'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만 차곡차곡 쌓인 선택의 결과들은 '내가 원하던 것이 이것이었던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경우가 많다.
그저 그 순간에 충실할 것 그리고 언제든 자기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자유. 어쩌면 그것만이 그런 아등바등한 몸부림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물론 조르바의 삶 전체를 긍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팔딱팔딱한 그의 언어와 행동 속에서 주인공처럼 필자 역시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사건 중심으로 서술된 것이 아니라 독해 자체는 쉽게 되지 않을 수 있고 일부 마음에 들지 않는 대목이 있을 수 있지만, 에너지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누군가라면 일독을 권하고 싶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