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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원 Oct 18. 2017

승자와 패자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이기적 유전자]를 읽고

우리는 그리고 살아있는 것들은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기계다. 우리의 존재 이유는 우리를 이루고 있는 유전자의 생존과 번영이다. 즉 유전자의 생존이 인간의 무의식적인 생존 이유이다. 그런 점에서 유전자는 이기적이다. 그리고 불멸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다음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일반화되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강력한 충격으로 다가오는 이 책의 논지는 사실 진화론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흔히들 자연선택이라는 용어를 무의식처럼 누군가 선택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 의도적으로 선택을 하는 주체는 사실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자연선택의 승자 즉 진화의 결과이며, 동시에 진화의 과정에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은 진화론을 매우 쉽게 그리고 강력한 전달력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유전자의 생존이라는 관점에서 어떠한 진화의 결과가 산출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자가 사자를 잡아먹지 않는 것은 그것이 그들에겐 ESS가 아니기 때문이다. 동종끼리 서로 잡아먹는 전략은 앞에서 살펴본 매파의 전략과 같은 이유로 불안정하다. 또 보복의 위험도 너무 크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종간의 싸움에는 별로 해당되지 않는다. 대개 피식자 동물이 보복하지 않고 도망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종의 두 개체 간 상호 작용에는 같은 종의 개체 간보다 더 큰 비대칭, 즉 더 큰 차이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개체 간 싸움에서 큰 비대칭이 존재할 때 ESS는 항상 그 비대칭에 근거한 조건부 전략이 될 가능성이 크다. 다른 종 간의 다툼에서 이용될 수 있는 비대칭은 얼마든지 있으므로 '작으면 도망가고 크면 공격하라'는 식의 전략이 훨씬 진화하기 쉽다. 예컨대 사자와 영양은 진화적 분기를 거쳐 어떤 안정 상태에 이르렀는데, 이들이 겪어 온 진화적 분기는 이들 간의 싸움에 본래 존재하던 비대칭을 점점 더 증폭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각각 쫓고 쫓기는 데 대가가 되었다. 사자에게 '맞서는' 전략을 취하는 돌연변이의 영양이 있다 해도 그는 지평선 너머로 도망쳐 사라지는 영양보다 성공적일 수 없을 것이다.


개개의 부모 동물은 가족계획을 실행하는데, 이것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손의 출생률을 최적화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최종적으로 살아남는 자기 새끼의 수를 최대화하려고 힘쓴다. 그러려면 새끼의 수가 지나치게 많아도 안 되고 지나치게 적어도 안 된다. 개체에서 너무 많은 수의 새끼를 가지도록 하는 유전자는 유전자 풀 속에 계속 살아남지 못한다. 그런 종류의 유전자를 체내에 가진 새끼들은 성체가 될 때까지 살아남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적 유전자'가 반드시 성립하지 않는 모습들도 제시하고 있다.


이기적 유전자론을 부정하는 증거라고 생각될 만한 극단적 오류의 예가 하나 있다. 새끼를 잃은 어미 원숭이가 다른 암놈으로부터 새끼를 훔쳐서 그 새끼를 보살피는 것이 관찰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을 '이중 오류'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 양모는 자기 시간을 낭비할 뿐만 아니라, 경쟁자인 암놈이 새끼를 키우는 부담에서 벗어나 더 빨리 다음 새끼를 낳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떠할까? 인간 역시 기본적으로 생물이기에 그러한 이기적 유전자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저자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을 제시한다. 바로 밈(meme)으로 표현되는 문화가 그것이다.


인간의 특이성은 대개 '문화'라고 하는 한 단어로 요약된다. 잘났다고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과학자의 입장에서 이 단어를 쓴다. 문화적 전달은 유전적 전달과 유사하다. 기본적으로 유전적 전달이 더 보수적이지만 일종의 진화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말이다. 영국의 시인 제프리 초서와 현대의 영국인은 대화를 나눌 수 없을 것이다. 비록 그 두 사람 사이에 20세대 가량의 영국인이라는 사슬이 중단 없이 이어졌다 할지라도 말이다. 이 사슬에서 가까운 세대의 사람들만이 자식이 아버지와 대화할 때처럼 서로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는 유전자가 아닌 수단에 의해 '진화'하는 것으로 생각되면, 게다가 그 속도는 유전적 진화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


새로이 등장한 수프는 인간의 문화라는 수프다. 새로이 등장한 자기 복제자에게도 이름이 필요한데, 그 이름으로는 문화 전달의 단위 또는 모방의 단위라는 개념을 담고 있는 명사가 적당할 것이다. 이에 알맞은 그리스어 어근으로부터 '미멤mimeme'이라는 말을 만들 수 있는데, 내가 원하는 것은 '진 gene'이라는 단어와 발음이 유사한 단음절의 단어다. 그러기 위해서 위의 단어를 밈meme으로 줄이고자 하는데, 이를 고전학자들이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우리가 "오늘날 생물학자는 모두 다윈의 이론을 믿고 있다"라고 해도 모든 생물학자의 뇌에 다윈의 단어들이 똑같은 사본으로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모두 다윈의 이론에 관하여 독자적 해석을 내리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다윈의 저작을 직접 읽었기보다는 최근에 쓰인 책에서 읽어 배웠을 것이다. 다윈의 말 중에는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틀린 부분이 많다. 만약 다윈이 이 책을 읽는다면 자신의 이론을 거의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가 내 설명법을 마음에 들어하기를 바라지만 말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모든 사정에도 불구하고 다윈주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언가는 이 이론을 이해하는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 현존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두 사람 간 의견의 일치란 무의미할 것이다. '아이디어 밈'은 뇌와 뇌 사이에 전달될 수 있는 실체로서 정의될 수 있을지 모른다. 즉, 단위 이론의 밈이란 그 이론을 이해하는 모든 뇌가 공유하는 그 이론의 본질적인 바탕이다. 사람들이 그 이론을 표현할 때 방법상의 차이점은 정의상 다윈 이론의 밈의 일부가 아닌 셈이다. 만약 다윈 이론이 A와 B 두 부분으로 나뉘어, 어떤 사람은 A를 믿는다 B는 안 믿고 다른 사람은 B를 믿는데 A를 불신하는 상황이라면, A와 B는 서로 다른 밈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A를 믿는 사람은 대개 B도 믿는다면, 즉 유전학 용어로 이 둘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면, 이 경우에는 양쪽을 합하여 하나의 밈으로 보는 것이 편리하다.


처음 나왔을 때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 책은 인간의 이른바 '자유의지'라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회의를 안겨 주는 책으로 많이 읽혀왔다. 그러나 저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유전자가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다. 즉 이해를 돕기 위해 마치 유전자가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책에서는 표현되지만 실제 그렇지는 않다. 유전자가 선택을 한다기 보다는 선택은 자연이 하는 것이며 그러한 자연 또한 의지를 가지고 선택을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즉 누군가가 의지를 가지고 행한 선택의 결과가 누군가의 생존과 절멸이 아니라 말 그대로 선택은 그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그 결과가 지금 존재하는 우리이며 동시에 우리 또한 계속되는 선택의 과정 속에 노출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관련해 전체적으로 필자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밈이라는 개념이었다. 생물학자가 문화 전달의 단위라는 밈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내고 그것이 인간의 진화에 매우 강력한 특이성이라 창안한 것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마치 결과는 운명에 맡겨져 있지만 그래도 무엇인가 해볼 수 있다고 말하는 묘한 이중 부정의 느낌이었다. 덧붙여 밈의 기계로 태어났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로 이기적 유전자와 이기적 밈에 대항할 수 있다는 접근 또한 그런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비록 어두운 쪽을 보고 인간이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라고 가정한다고 해도, 우리의 의식적인 선견지명, 즉 상상력을 통해 장래의 일을 모의실험하는 능력이 맹목적인 자기 복제자들의 이기성으로 인한 최악의 상황에서 우리를 구해 줄 것이다. 적어도 우리에게 당장 눈앞의 이기적 이익보다 장기적인 이기적 이익을 따질 정도의 지적 능력은 있다. 우리는 '비둘기파의 공동 행위'에 가담하는 것이 장기적 이익이 될 수 있음을 이해할 능력이 있으며, 이 공동 행위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그 방법을 서로 논의할 능력이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낳아 준 이기적 유전자에 반항하거나, 더 필요하다면 우리를 교화시킨 이기적 밈에게도 반항할 힘이 있다. 순수하고 사욕이 없는 이타주의라는 것은 자연계에는 안주할 여지도 없고 전 세계의 역사를 통틀어 존재한 예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육성하고 가르칠 방법도 논할 수 있다. 우리는 유전자의 기계로 만들어졌고 밈의 기계로서 자라났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


먼 미래의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었을 진화라는 생존 게임에 '생존'이 아닌 기준을 세워서, 무차별적인 생존 게임에 대항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어쩌면 너무 로맨틱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인간은 자신을 전달 수단으로 삼는 '밈'을 창조하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진정 정해져 있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 수 있지 않느냐는 생각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군데군데 약간의 머리 아픔(?)을 동반할 수 있지만 생물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대체적으로 쉽게 읽을 수 있다. '진화론'에 대해 알고 싶은 분 그리고 인간만의 특이성을 찾고 싶은 분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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