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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원 Nov 12. 2017

보이지 않는 손만으로 행복해질 수는 없다

[거대한 전환]을 읽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합리적인' 인간이다. 아니 정확하게 '합리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여기서의 '합리적인'은 흔히 경제학에서 이야기되는 더 나은 효용을 가져다줄 것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더 나은 효용을 가져올 선택을 하지 않는 경우는 매우 자주 일어난다. 그리고 그런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는 매우 다양하다. 동시에 상당수는 그러한 '비합리적인' 선택이 사실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은 많은 돈을 원할지는 몰라도 돈만으로 살아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를 논할 때는 이러한 명제를 지워버리고 접근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마치 인간이 '경제적 이익'에 세뇌되어, 사람들 행동의 집합체인 특정한 그래프의 방향성을 위반하는 결정을 하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덕분에 너무나 당연한 것이겠지만 현실에서는 책 속의 그래프가 뒤틀리기도 하고 심한 경우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이 책은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출처 : 다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유시장경제'라는 단어는 지극히 자연스럽다. 동의의 수준에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수요와 공급에 의한 가격 조정으로 생산과 소비가 마법처럼 조정되며 자원의 최적 배분점을 찾아간다는 자유시장경제 일반에 대해 많은 이들은 당연한 명제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생각에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가 이 책에서 주장하려는 명제는 다음과 같다. 이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마디로 완전히 유토피아이다. 그런 제도는 아주 잠시도 존재할 수가 없으며,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내용물은 아예 씨를 말려버리게 되어 있다. 인간은 그야말로 신체적으로 파괴당할 것이며 삶의 환경은 황무지가 될 것이다. 따라서 사회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떤 보호 조치이든 취하는 족족 시장의 자기조정 기능을 망가뜨리고 산업의 일상적 작동을 혼란에 빠트렸기에 사회는 또 다른 방향에서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 바로 이러한 딜레마 때문에 시장 체제의 발전 과정은 미리 정해진 길을 따라가게 되었고, 결국에는 자신을 기초로 삼는 사회 조직마저 무너뜨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시장이 스스로 조정을 이루어가는 '자기조정 시장'이 불가능한 것에 대해, 저자는 상품이 될 수 없는 것을 상품으로 생각하는 발상에서 이유를 찾고 있다. 


결정적인 핵심은 다음과 같다. 노동, 토지, 화폐는 산업의 필수 요소이며, 이것들도 시장에서 조직되어야 한다. 사실 이 시장들이야말로 경제 체제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부분을 형성한다. 그러나 토지, 노동, 화폐는 분명 상품이 아니다. 매매되는 것들은 모두 판매를 위해 생산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가정은 이 세 가지에 관한 한 결코 적용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상품에 대한 경험적 정의를 따르면, 이 세 가지는 상품이 될 수 없다. 노동이란 인간 활동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인간 활동은 인간의 생명과 함께 붙어 있는 것이며, 판매를 위해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이유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 활동은 생명의 다른 영역과 분리할 수 없으며, 비축할 수도 사람 자신과 분리하여 동원할 수도 없다. 그리고 토지란 단지 자연의 다른 이름일 뿐인데, 자연은 인간이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현실의 화폐는 그저 구매력의 징표일 뿐이며, 구매력이란 은행업이나 국가 금융의 메커니즘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이들 어떤 것도 판매를 위해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노동, 토지, 화폐를 상품으로 묘사하는 것은 전적으로 허구이다.


특히 이와 관련해 저자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며, 흔히 경제적 동기에 의해 진행된다는 것들도 사실은 비경제적 동기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초기 사회에 대한 최근 연구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면, 인간은 한결같이 사회적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여러 천성적 자질들은 시대와 장소를 넘어서 모든 사회에 고루 나타나며, 인간 사회의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 것도 변함없이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의 역사적, 인류학적 연구에서 나온 두드러진 발견은, 인간의 경제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사회관계 속에 깊숙이 잠겨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물질적 재화의 소유라는 개인적 이해를 지켜내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행동하여 지키려는 것은 그의 사회적 지위, 사회적 권리, 사회적 자산이다. 인간이 물질적 재화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오로지 이러한 목적들에 도움이 되는 만큼으로 한정된다. 생산 과정도 분배 과정도 재화의 소유와 관련된 특정한 경제적 이해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과정을 이루는 단계 하나하나가 모두 수많은 사회 차원의 이익과 맞아떨어지게 되어 있으며, 이 수많은 사회 차원의 이익이야말로 그 과정이 진행되는 데에 필요한 각 단계들이 무리 없이 이루어지도록 보장해준다. 이러한 사회 차원의 이익이라는 것은 작은 수렵 어로 공동체냐 거대한 전제 왕국이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겠지만, 어느 쪽이든 경제 체제가 비경제적 동기들로 작동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관련해서 무역 역시 그 기원이 경제적 동기가 아니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역사 속의 다양한 인간 공동체들은 외부와의 무역을 결코 완전히 그만둔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무역이 반드시 여러 시장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외부와의 무역이란 그 기원을 따져보면 물물교환보다는 오히려 모험, 탐험, 수렵, 해적질, 전쟁 등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무역이란 본래 쌍방향성이나 평화 어느 쪽도 내포하지 않는다. 또 내포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도 그 쌍방향성이나 평화를 조직하는 데에 기초가 되는 것은 상호성의 원리이지 물물교환의 원리가 아니다.


결론적으로 저자인 칼 폴라니는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말은 허구이며, 자율적인 시장 메커니즘에 맡겨둘 경우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는 무지막지하게 부서질 것임을 강하게 경고하고 있다. 


인간과 자연환경의 운명이 순전히 시장 메커니즘 하나에 좌우된다면 결국 사회는 완전히 폐허가 될 것이다. 구매력의 양과 그 사용을 시장 메커니즘에 따라 결정하는 것도 똑같은 결과를 낳는다. 비록 사람들은 '노동력'도 다른 상품이나 똑같은 것이라고 우겨대지만, 그것을 일하라고 재촉하거나 마구 써먹거나 심지어 사용하지 않고 내버려두거나 하면 그 특별한 상품을 몸에 담은 인간 개개인은 어떻게든 반드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마련이다. 이런 체제 아래서 인간의 노동력을 그 소유자가 마음대로 처리하다 보면 그 노동력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사람'이라는 육체적, 심리적, 도덕적 실체도 소유자가 마음대로 처리하게 된다. 인간들은 갖가지 문화적 제도라는 보호막이 모두 벗겨진 채 사회에 알몸으로 노출되고 결국 쇠락해간다. 악덕, 인격 파탄, 범죄, 굶주림 등을 거치면서 격심한 사회적 혼란의 희생양이 되어갈 것이다. 자연은 그 구성 원소들로 환원되어버리고, 주거지와 경관은 더럽혀진다. 또 강이 오염되고, 군사 안보가 위협당하면, 식량과 원자재를 생산하는 능력도 파괴된다. 마지막으로, 구매력의 공급을 시장 기구가 관리하게 되면 영리 기업들은 주기적으로 파산하게 될 것이다. 원시 사회가 홍수나 가뭄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던 것처럼 화폐의 부족이나 과잉은 경기에 엄청난 재난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 시장, 토지 시장, 화폐 시장이 시장경제에 필수적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인간과 자연이라는 사회의 실체 및 사회의 경제조직이 보호받지 못하고 시장경제라는 '사탄의 맷돌'에 노출된다면, 그렇게 무지막지한 상품 허구의 경제 체제가 몰고 올 결과를 어떤 사회도 단 한순간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시장경제가 가능하다는 근거로 제시되는 예전 미국의 사례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은 시장경제가 스스로 기능할 능력이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로서 미국을 예로 들어왔다. 미국에서는 1세기 동안 노동, 토지, 화폐가 완전히 자유롭게 거래되었지만 어떠한 사회 보호 조치도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입 관세를 제외하면 산업을 정부 개입으로 방해받는 일 없이 굴러갔다는 것이다. 왜 미국에서 이러한 일이 가능했는가. 단순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다. 노동, 토지, 화폐가 무한정이었기 때문이다. 1890년대가 되기 전에는 서부 개척지가 아직도 남아 있어 무제한의 토지 공급이 계속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싼 임금의 노동자들이 무제한으로 유입되었다. 그리고 19세기가 끝날 때까지도 미국 화폐의 외환 가치를 안정시켜야 할 책임 따위는 없었다. 토지, 노동, 화폐의 무제한 공급이 계속해서 가능했던 것이며, 따라서 이곳에는 자기조정 시장 체제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무제한 공급이라는 조건이 충족되는 한, 인간도 토지도 영리 조직도 정부 개입으로만 얻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보호 장치가 필요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조건이 사라지게 되자 곧바로 사회 보호가 나타나게 되었다. 마르는 법이 없었던 이민자들의 저수지에서 하층 노동자들을 마음껏 데려다 쓸 수 있는 상황도 끝나게 되었고, 이민자들의 상층부도 마음껏 자기 땅을 찾아 정착할 수 없게 되었다. 토지나 여러 천연자원들도 희소하게 되어 절약해서 써야 했다. 통화 공급을 정치 논리에서 떼어내고 국내의 교역을 국제교역과 연결시키기 위해 금본위제가 도입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도래하자 미국도 지난 1세기 동안 유럽이 밟아온 길을 빠른 시간 내에 되풀이하게 되었다. 토지와 경작자들의 보호, 노동조합과 입법을 통한 노동의 사회적 안전성, 중앙은행 등이 모두-그것도 어마어마한 규모로-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통화의 보호주의가 제일 처음에 나타났다. 금본위제의 요구와 국내의 지역적 요구를 조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연방준비제도가 수립되었다. 토지와 노동에 대한 보호주의도 뒤이어 나타났다. 1920년대의 번영은 10년으로 끝나버렸고 그 후에는 너무나 심한 경제 공황이 나타나서 결국 뉴딜 정책이 출현하게 되었던바, 뉴딜 정책이 노동과 토지를 보호하기 위해 둘러친 해자는 유럽 어떤 나라에서 나타났던 비슷한 조치보다도 훨씬 더 넓고 깊은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오히려 긍정적인 방향과 부정적인 방향 모두에서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것에는 결국 사회적 보호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는 우리의 핵심 주장을 입증해주는 충격적인 증거가 되었다.


그리고 제한 없는 자유시장경제의 유토피아라는 이상이 실현되는 모습에 대해 미국의 학자 프레드 블록은 자신이 쓴 이 책의 해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요컨대 신자유주의자들이 꿈꾸는 국경 없고 평화로운 지구라는 유토피아의 이상이 실현되려면, 경제에는 상당히 지속적인 발작이 한 번씩-아마도 5년이나 10년에는 꼭 한 번씩-벌어져야 하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그 전의 절반 혹은 그 이하의 소득으로 생존 게임을 벌여야 하며, 사람들 모두가 이러한 정도의 상황을 견뎌낼 만큼의 유연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즉 그러한 유토피아는 전 세계에 걸치 수백만 명의 보통 사람들에게 바로 그러한 유연성을 갖추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폴라니가 믿기로,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탄력성을 가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도덕적으로도 그릇될 뿐만 아니라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폴라니가 보기에 이러한 경제적 충격이 나타나게 되면 사람들이 그것에 맞서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를 동원하는 것은 절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인간은 대단히 유연하지만 기본적으로 생물이다. 즉 본인에게 닥쳐오는 변화에 대해 적응하는 능력은 다른 어떤 동물들보다 뛰어날지 몰라도, 그렇게 변화할 수 있는 수준과 속도라는 것은 결국 제한적이라는 이야기다. 상황에 따라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자유롭게 변형시킬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실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급격한 변화에 대한 적응은 생물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지만, 계속해서 생존의 위기를 넘어서는 적응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계속해서 그리고 더 빠르게 강요되는 개개인에 대한 변화는 과연 인간의 상황을 어떤 식으로 만들어갈까?


사실 쉽게 읽히는 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현재를 고민하고 경제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읽어야 하는 책임에는 틀림없다. 질문으로 끝난 필자의 이 서평처럼 다양한 질문의 씨앗들이 이 책 속에서 맴돌고 있고, 대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질문을 찾는 것에서 새로움과 성장은 시작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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