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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원 Mar 07. 2018

무색 잉크를 아시나요?

광물자원공사 그리고 자원외교에 관하여

무색 잉크라는 것이 있습니다. 잉크란 원래 백지에 색을 드러내 글씨를 표시하기 위한 것인데, 무색 잉크라니 이 무슨 형용모순 같은 것이 있냐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사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은행에서는 무색 잉크라는 것을 사용합니다. 정확하게는 무색 형광물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색 잉크의 주 사용처는 일반자기앞수표(10만원, 1백만원 같은 정액이 아닌 금액이 사전에 정해지지 않은 수표)를 발행할 때입니다. 빈 수표 용지에 프린트로 금액을 인자하는 일반자기앞수표는 위변조의 위험이 높아 실무적으로는 수표 표면에 무색 잉크로 금액을 기재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렇게 무색 잉크로 기재된 내용은 사실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고 별도의 판독기(뭐 대단한 기계는 아닙니다)를 통해서만 기재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무색 잉크를 위의 용도가 아닌 용도로 은행에서 사용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제가 은행에서 일할 때 처음 대출 실무를 가르쳐 준 선배에게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그 선배가 첫 지점에서 무지막지한 양의 대출 업무를 수행하던 시절, 어느 날 지점장 혹은 팀장이 대출 취급하라고 서류를 가져다주었는데, 선배가 보기에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대출이었답니다. 물론 선배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지만, 결과는 예상대로 '그냥 해'였습니다. 울며 겨자먹기로 선배가 대출을 취급하면서 냈던 아이디어가 무색 잉크였습니다. 대출 취급에는 꽤나 많은 서류가 필요합니다(대출거래약정서를 비롯해, 신청서, 재무자료 등 채권보전과 대출 승인을 위한 자료들이 꽤나 많습니다). 선배는 그중 어느 하나의 서류 빈칸에 무색 잉크로 이 대출이 누구에 의해 강제로 취급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작성했던 것입니다. 물론 해당 내용은 그 서류를 결재하는 사람들의 눈에 확인될 수 없없습니다. 손바닥만 한 판독기를 대출 서류마다 들이밀 만큼 지점장이나 팀장이 여유가 있지는 않고, 결정적으로 대출 서류 결재에 그 무색 잉크 판독기를 써야 할 이유가 없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 선배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나름의 보험을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혹시나 문제가 되었을 때 본인이 살아남기 위해서(아 그 선배는 현재는 은행을 퇴직해 잘 살고 있고 관련해 문제가 된 적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저의 경우도 대출 업무를 하면서 무색 잉크를 그렇게 용도 외로 사용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한참이나 지난 그리고 이렇게나 생뚱맞게도 제가 지금 무색 잉크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일반적으로 뭔가 구리거나 꺼릴만한 일을 할 때는 누구나가 자신만의 무색 잉크를 만드는 것을 고민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즉 조직 내에서 뭔가 나중에 문제가 되거나 혹은 지금 문제가 될만한 일을 맡게 되고 하게 되는 사람은 극단적으로 바보가 아니라면 무언가 자신이 살아남을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벌써 열흘 가까이 지났지만 지난 광물자원공사 처리 방안에 대한 좌담회(2/22)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그 부분이 가장 궁금했습니다. 당시에는 경제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는 멕시코 볼레오 사업. 잘 모르겠습니다. 1억짜리 사업을 하는 것이 일상화된 회사에서 갑자기 10억짜리 사업을 하라고 하면 잘할 수 있을까요? 물론 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회사의 구성원들은 고민이 많아지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잘 하는 것일까? 망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그런데 괜찮았다는 평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정말 괜찮았다고 해도 여러 번 돌다리를 두들겼을 것 같습니다. 특히나 공기업이라면 말입니다. 아니면 그 누군가는 자신만의 무색 잉크를 만들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뭐 반드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가능성을 따져보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현재까지는 보시는 바와 같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광물자원공사는 광해관리공단과 통폐합을 해서 처리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이 등장했습니다. 뭐 좋습니다. 그런 결론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마음은 없습니다. 자원개발이라는 사업의 필요성, 일하고 있는 노동자의 문제 등등해서 반드시 회사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회사의 존폐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잘못되었고 그 잘못이 어디서부터 나온 것인지를 명확하게 따져보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 과정에는 누군가의 무색 잉크가 정말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그리고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저 저 혼자만의 대뇌 망상 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대뇌 망상이 뇌에서 지워지질 않으니 참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상한 것인지, 아니면 무색 잉크라는 건 존재하지도 않고 당시에는 모든 것이 맞는 일이라는 말이 이상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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