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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원 Jul 24. 2020

현실과 이상은 만날 수 있을까?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읽고

누구나 꿈이 있다. 그러나 많은 꿈은 세월과 세파 속에 사라져 버린다. 덕분에 꿈은 그저 잠잘 때 꾸는 꿈과 다를 바 없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여기 그 꿈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출처 : 교보문고]

일본 무로마치 막부 말기 이른바 전국 시대는 누군가를 죽이든 죽임을 당하든 전쟁이 일상처럼 자리 잡은 시기였다. 계속되는 전쟁에 지쳐간 사람들이 평화를 염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평화를 원하는 만인의 생각은 여럿의 뜻을 모아내야 할 소수의 사람들에게도 전해졌다. 그러나 누구를 중심으로 한 평화라는 것에 대한 생각은 제각각이었다. 그렇게 다른 생각은 다시 전쟁을 불러일으켰고 그러한 전쟁은 또한 새로운 전쟁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만인의 희망이 평화라면 소수의 사람들만으로 그러한 희망을 가릴 수는 없는 법. 결국 전쟁은 사라졌고 평화는 다시 찾아왔다. 여기 그러한 평화를 만들어내는 데 특히 주목해야 할 세 사람이 있다.  


기존의 관습과 생각을 타파한 오다 노부나가,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탁월한 능력으로 최고의 관직까지 올라간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없을지 몰라도 누구보다 강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들이다. 


그 중 결국 최후의 주인공이 되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서술된 이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이 첨가된 역사소설이지만, 작가의 표현처럼 이상(理想) 소설이라는 수식어가 적합한 작품이다. 평화라는 강력한 지향점을 실현하기 위한 작가의 바람이 역사 속 실제 인물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투영되어 표현된 소설. 사실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말 신불의 화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에야스라는 인물은 매력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물론 실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부처라 불릴 만큼의 인물은 아니었을 수 있다. 역사적 사실 수준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평화의 화신으로 보고 인물의 내면을 그려낸 작가의 의도가 다소 과한 측면은 있지만, 실제 이에야스라는 인물의 면모에는 분명 평범한 사람이 쉽게 보여줄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이에야스의 강점을 가장 강하게 보여주는 것은 앞서 언급한 세 인물에 대한 평이 담겨있는 당시의 시가이다.


울지 않는다면, 죽여 버리겠다. 두견새야 (오다 노부나가)

울지 않는다면, 울게 만들겠다. 두견새야 (도요토미 히데요시)

울지 않는다면, 울 때까지 기다리겠다. 두견새야 (도쿠가와 이에야스)


인내와 기다림은 언제나 어렵다. 노부나가 생존 시에는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노부나가 사후에는 싸움에 진 적이 없다는 히데요시에게 유일하게 승리하고 그의 어머니까지 인질로 잡았음에도 그의 명령에 따라 근거지를 옮기고 사실상 가신처럼 행동한 이에야스의 행동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히데요시와 제대로 붙으면 자신이 승리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이에야스는 해 본 적이 없었을까? 승리의 확률이 50%에 조금 못 미친다 해도 한 번쯤 해봄직한 싸움이라는 생각을 수십 번 아니 히데요시가 죽는 그 순간까지 이에야스는 매 순간 고민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것은 ‘내가 하면 다 된다’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흔한 권력자와 이에야스가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아마 작가는 그런 역사적 사실에서 이에야스에게 매료되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이에야스의 인내력은 시대의 흐름을 읽는 그의 안목이 있었기에 발휘될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오랜 전쟁에 지쳐 있는 사람들의 바람 그리고 대외 무역이라는 경제 형태의 변화와 같이 시대가 어떻게 흘러갈지에 대한 이에야스의 인식과 안목이 그를 기다리게 만들고 결국 그의 뜻을 이루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작가의 생각과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소설 중간에 작가는 이에야스의 입을 빌려 천하에 도움되는 것이 내 가문에 도움되는 것이며 나에게 도움되는 것이라 말한다. 개인의 욕심과 세상의 흐름을 일치시킬 수 있다면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 세상을 위해 일하는 것이고 세상을 위해 일하는 것이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운명과 숙명, 천명에 대한 생각까지 연결된다. 운명과 숙명, 천명 사실 거의 똑같은 말처럼 느껴지는 이 단어들의 뜻에 대해 작가는 이에야스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카츠시게 : 운명과 숙명, 천명은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이에야스 : 그 정도의 나이가 되고도 아직 모르겠나? 들어보게, 여기에 작은 찻잔 하나를 올려놓은 둥근 쟁반이 있다고 가정하세. 그 찻잔을 사람이라고 하세. 그러면 이 찻잔은 쟁반 안에서는 오른쪽으로도 가고 왼쪽으로도 가는 등 쟁반 가장자리가 가로막힐 때까지가 운명이야. 따라서 운명이란 그 사람의 의지로 개척할 수도 있고 쌓아올릴 수도 있어.

카츠시게 : 과연 그렇습니다.

이에야스 : 그리고 이 쟁반의 가장자리... 가로막혀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곳, 더 이상은 가지 못한다고 막아선 이 쟁반의 가장자리. 이것이 숙명이라는 거야. 오사카 성의 황금은 히데요리의 생각과 의사를 가로막는 숙명이 되었어. 그러나 그 숙명 위에 천명이란 것이 있어.

이에야스 : 천명이란 쟁반, 그 위의 찻잔, 그리고 또 그 쟁반의 가장자리..... 이런 것을 모두 만들어내는 천지의 명이야.

인간은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천명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자기를 살릴 수 있어. 나의 천명은 무엇이냐..... 이를 깨닫는 일은 또한 자기에게 부과된 사명이기도 해. 이를 깨닫지 못하는 동안에는 아무리 움직여도 허사가 되는 것이야. 숙명의 테두리 안에서의 발버둥밖에 되지 않아

-도쿠가와 이에야스 31권에서 발췌


작가는 이에야스가 평화라는 지향점에 도달하는 것이 자신의 천명임을 깨닫고 자신에게 부과된 사명을 다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이 노부나가보다 과감하지 않고 히데요시보다 뛰어나지 않지만 이에야스를 최후의 승자로 만들어낸 힘이라고 작가는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이에야스의 사람 보는 눈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 있으니 인간은 칠 할이 감정이고 삼 할이 이성이라는 말을 언급할 때이다. 이에야스는 매우 이성적이라 평가받는 인간이라도 감정이 육 할이라 말한다. 사실 많은 아니 대다수의 인간이 자신의 결정들은 이모저모를 따져 합리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포장하지만 실제 그런 결정이 얼마나 될까? 인간의 70%는 감정이라는 이에야스의 단언은 필자 역시도 두고두고 가슴에 새기고 가야 할 지적이라 생각한다.  


32권이라는 무지막지한 분량과 어마어마한 수의 등장인물 그리고 인물의 이름이 계속 바뀌는 미쳐 버릴 것 같은 서술에도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이렇게 순식간에 읽고 순식간에 이 감상을 써 내려가고 있지만, 머릿속에는 풀지 못한 이야기, 감정, 생각, 고민들이 마구 뒤엉켜 있다. 24년 만에 마음이 이렇게저렇게 요동치는 느낌이다. 두고두고 곱씹으며 서두르지 말고 한 가지씩 정리해나가야겠다. 아마 다시 읽을 그 날이 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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