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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깨비 Dec 23. 2016

마돈나와 마돈나 <마돈나>(2014)

신화화된 모성애를 위하여

이 세상에 모든 엄마는 마돈나다. 희생과 자비, 그리고 사랑으로 가득차신 성모 마리아다. 아니, 그렇다고 우리는 믿는다. 엄마가 된 그녀들조차도 이 명제를 정언명령으로 여긴다. 자식 있는 어미의 ‘모성애’는 심지어 본능이라고까지 여겨진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엄마의 희생과 자비, 그리고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렇지 않은 여성에게는 사람도 아니라며 손가락질을 해댄다. 실제로 많은 엄마들이 여기서 고통 받고 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울고불고 하는 자식 놈이 미워 죽겠는 자신이 용납되지 않다는 것이다.엄마란 존재는 어떤 상황에서든, 당연히 자식을 사랑해야 하는 게 아니었던가? 여기서 오는 엄마로서의 좌절감. 이것은 ‘산후우울증’이라는 질병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바로 우리 사회 내에 만연한 ‘모성의 신화화’로 말미암은 것이다. ‘모성의 신화화’는 여성성을 강조하는 지배적 젠더코드로써 역할을 한다. ‘지배적 남성성’과 ‘강조된 여성성’을 잘 보여주는 기제라는 것이다. ‘여성은 모름지기 그래야만 한다는(모성애)’ 무언의 압박은 여성을 타자화시키고 억압한다.



내가 읽은 신수원 감독의 영화 <마돈나>(2014)는 여성의 억압을 불편할 만큼 묘사하면서 다시 모성신화를 울부짖으며 여성성을 강조하는 모순의 텍스트였다. 영화에 등장하는 미나(권소현)는 사회에서 처절하게 유린당하는 서발턴subaltern의 표상이다. 영화는 그녀의 삶을 추적하며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이 어떻게 고통 받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특히나 그녀의 신체가 성적 쾌락 대상으로 전락해버리며 주체를 상실하는 과정은 너무나도 불편했다. 영화에서는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조명과 클로즈업이 두드러지게 사용된다. 이것은 그녀의 고통에 감정이입하는 걸 도와주고 있다. 그렇게 나는 그녀에게 몰아치는 억압과 고통에 분노했다. 그런데 영화는 미나의 고통을 그녀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분산시키며 또 다시 미나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는 기꺼이 목숨도 받쳐야 한다는 ‘모성 신화’가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억압당하는 여성성을 고발하면서도 다시금 여성성을 강조하는 ‘모성 신화’로 되돌아오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모성 신화’는 영화를 이끌어가는 해림(서영희)에 의해서 더 강화된다. 그녀는 VIP 병동에 간호조무사다.그곳에서 이 병원에 실소유자이자 VIP 중에 VIP인 전신마비 환자 철오(유순철)를 담당하게 된다. 여기서 철오의 아들 상우(김영민)를 만나며 모종의 제안을 받는다. 옆방에 혼수상태로 있는 미나의 가족을 찾아 장기기증 동의서를 받아오라는 것이다. 해림은 이를 수락하고 미나의 과거를 추적한다. 이로써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해림은 미나에게 동화되며 그녀를 도와주기로 결심한다. 해림은 왜 미나에게 동화되었을까? 이것은 오프닝 시퀀스와 연관이 있다. 한 여자가 캐리어를 물속에 버리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이 오프닝은 관객들을 계속 궁금하게 만든다. 이 궁금증은 영화 중반에 해소된다.그 한 여자는 해림이었고, 그녀가 버린 캐리어 안에는 그녀가 낳은 아이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낳은 아이를 유기한 것이다. 이 죄책감으로 해림은 미나를 필사적으로 돕기로 한 것이다. 해림은 자신이 외면한 모성 신화를 미나를 통해 재현하려 한 것이다. 이것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연출된다. 물속 깊이 가라앉은 캐리어 안에 아기를 미나가 꺼내 물 밖으로 향하는 이 장면은, 판타지적이며 아주 감각적인 장면이었다.



이 세상에 모든 여자는 마돈나다. 섹시와 치명적인 매력으로 무장한 섹시 심볼 마돈나다. 아니, 그랬으면 하는 남자들의 바람이다. 여성을 향한 남성들의 시선은 딱 르네 마그리트가 그린 <Le vilo(강간)>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본다는 이야기다. 그녀들은 스스로 이렇게 타자화된 여성성에 순응한다. 더 깊게 파인 옷, 더 짧은 치마로 마돈나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 <마돈나>의 미나 역시 하이힐과 스타킹, 짧은 치마로 자신이 존재함을 느낀다. 또한 자신의 큰 가슴 덕분에 생긴 ‘마돈나’라는 별명을 꺼려하지 않는다. 지배적 남성성이 강요하는 강조된 성적 여성성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이렇게 강조된 여성성으로 타자화된 여성이 사회에서 어떻게 핍박당하고 유린되는지 자극적으로 고발한다. 그러나 이 고발의 끝이 여성 해방을 외치고 있지는 않다. 앞서 말했듯이 가장 여성을 ‘여성다움’으로 ‘규정’하는 ‘모성 신화’의 이데올로기를 계속하여 주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마돈나’(섹시 심볼 마돈나와 같은 여성성)는 부정하면서 ‘마돈나’(성모 마리아와 같은 여성성)는 긍정하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 여성을 가장 억압하는 매커니즘은 성모 마리아와 같은 희생과 순종을 요구하는 여성성인데 말이다. 퀴어 이론의 창시자인 주디스 버틀러의 해체주의적인 성 담론이 더욱 활발히 논의되어야 할 듯하다.

                                               르네 마그리트 <Le vilo(강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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