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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깨비 Dec 28. 2016

찌질한 답장 혹은 변명 <인사이드 아웃>(2015)

페미니즘을 중심으로 바라 본 양성의 차이

<당신에게 바치는, 다소 긴 답장>


  

소개팅을 했다. 작년 여름쯤이었다. 무척 예뻤고, 그랬으니 당연히 마음에 들었다. 덕분에 기분 나쁜 소나기도 내겐 단비였고, 짜증을 유발하는 더위도 내겐 포근했다. 그렇게 세 번째 만나던 날, 우리는 영화 <인사이드 아웃>(2015)을 봤다. 그리고 우린, 헤어졌다.  


이유가 뭐였을까? 친구들과 술을 먹으며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무래도 <인사이드 아웃>이 문제였던 거 같다. 영화관을 나오며, 그녀는 눈물을 훔쳤다. 나는 왜 우냐고 물었고, 그녀는 영화가 너무 슬프다고 했다. 낯선 곳에서 겪는 라일리의 외로움, 빙봉의 희생어린 소멸, 사춘기 소녀의 방황 등이 마치 자신 같았다고 했다. 나는 “뭐 그런 거 가지고 우냐”고 무심코 한 마디 던졌다. 그리고 그날 밤, 문자가 왔다. ‘우린 잘 안 맞는 거 같아요.’  


물론 이것이 헤어진 이유의 전부는 아닐 테지만, 그날의 사건이 주요 역할을 했음은 틀림없다. 영화가 던지는 ‘공감’이라는 주제에 감응하지 못한 내 탓이며, 영화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슬픔이’의 존재를 무시한 내 아둔함이 죄다. 어쩌면 이 글은 1년간 묵혀왔던 소개팅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는 글이 될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론, 당신이 고한 이별 문자에 대한, 다소 긴 답장이 되겠다.  


<원인1: 너와 내가 보는 방식의 차이>  



영화 <인사이드 아웃>은 11살 소녀 라일리의 성장 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이 영화는 이것을 현대 심리학과 연결시켜 흥미롭게 진행한다. 다른 성장담을 다룬 작품들과의 차별성을 갖는 까닭이다. 실제로 제작진은 폴 에크만 같은 저명한 심리학자 여러 명에게 자문을 구하며 최신의 심리 연구 결과들을 영화 속에 반영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신경과학자나 심리학자들이 이 영화를 보고 깜짝깜짝 놀랐다는 후일담이 들리곤 한다.

 

영화는 주인공 라일리가 낯선 장소로 이사를 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라일리 머릿속에 있는 다섯 가지 감정이 난리가 난다. 낯선 환경에 대한 반응이 제각각 나타난다. 기쁨이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라일리의 기분을 좋게 하려고 한다. 까칠이는 이름답게 까칠하게 굴고, 버럭이는 대뜸 화를 내며, 소심이는 어딘가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위협에 불안해한다. 그리고 슬픔이는 이 모든 상황이 슬프기만 하다. 이로 인해 기쁨이와 슬픔이는 마찰을 빚게 되고, 콘트롤 타워를 벗어나 라일리 머릿속을 여행하게 된다.

 

여기서 가장 크게 드는 의문 하나, 왜 라일리는 ‘소녀’인가? ‘소년’이었으면 안 될까? ‘라일리’가 소년이었다면, 나는 보다 영화에 감정이입을 잘해서 그녀의 울음을 닦아줄 수 있었을 테다. 내 주장이 아니라, 페미니즘 이론가 매리 앤 도안에 따르면 그렇다. 도안은 영화를 보는 남성과 여성의 시각이 다름을 피력했다. 여성은 ‘근접성’에 기초해 영화를 보고, 남성은 ‘분리와 거리두기’를 통해 영화를 본다고 했다.  


여성의 근접성에 입각한 영화보기는 뛰어난 감정이입을 동반한다. 여성은 남녀 주인공에 상관없이 인물에 과잉 동일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근거로 도안은 여성에게 양성성(androgyny)이 있다고 말한다. 반면, 남성은 대상과 거리를 두고 이성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정신분석학적인 해석으로는, 거세 위협 때문이다. 자신의 남근을 거세당하지 않으려고 거리를 두는 것이다. 남성은 인물에 이입되기보다, 멀리서 관찰하는 관음주의적 영화보기 경향을 띠게 된다.  


남성 관객인 내가 11살 소녀 라일리에게 감정이입하기란 이토록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남성인 나는 라일리의 행동을 분석하고 앉아 있었다. 여성인 그녀는 영화를 보는 내내 오롯이 라일리였다. 이런 차이에서 오는 코미디는 개그 소재 등으로 이미 여러 번 다뤄진 바 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가 베스트셀러가 된 까닭이기도 할 테다. 배우 이희준이 출연한 단편영화 <그들은 대화중> 역시 같은 선상에 있다. 내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한 건,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당연한 반응이었다는 말이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하자면, 내 소중한 남근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적 반응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원인2: 라일리가 ‘소녀’였기에>  



다시 돌아와, 감독은 왜 ‘소녀’를 주인공으로 두어 내게 이련 시련을 안겼을까? 감독은 명랑했던 딸이 11살이 되자 갑작스럽게 말수가 줄어드는 걸 보고 걱정했다고 한다. 그는 이것을 고민하다가 감정으로 의인화한 애니메이션을 통해 이를 표현해보고자 했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딸바보 아빠의 자식 사랑인 셈이다. 그의 자식 사랑이 내 사랑을 방해한 것에 대해 심심한 유감을 표하는 바이다.  


딸바보 감독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영화의 주인공은 ‘소녀’여야만 했다. 바로 영화에서 부각하는 ‘슬픔이’의 존재 때문이다. 슬픔이는 공감이라는 영화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는 캐릭터다.  따라서 이를 강조하기 위해서는 슬픔과 잘 어울리는 캐릭터를 설정해야 했을 테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11살 ‘소녀’, 라일리가 거기에 딱 안성맞춤이다. 여기서 방점을 두고자 하는 건, 11살이라는 ‘나이’ 이라기보다 ‘소녀’라는 성정체성이다.


우리는 앞서 도안이라는 페미니즘 이론가를 통해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공감’에 뛰어난 존재임을 밝힌바 있다. 더 보충하자면,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의 선구자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말도 인용할 수 있겠다. 그녀는 남성이 이성과 과학, 권위의 담론이라면 여성은 이에 저항하는 담론을 펼친다고 했다. 정신분석학 관점에서 남성은 에고의 언어를 말하지만, 여성은 무의식과 욕망의 언어를 말한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남성은 에고의 영역인 상징계에 있고. 여성은 이드의 영역인 기호계에 있다. 이는 여성이 왜 뛰어난 공감능력을 갖는지 말해준다.  


이 공감 능력은 영화에서 ‘슬픔이’라는 캐릭터로 대변된다. ‘슬픔’이라는 추상적 감정은 ‘눈물’로 형상화되곤 한다. 주인공 라일리가 방황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눈물을 터뜨린다. 눈물은 영화의 주제를 표현하는 동시에 모든 갈등을 해소시키는 장치로 사용된다. 이것이 보다 효과적이었던 이유는, 라일리가 ‘소녀’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슬픔이란 감정을 여성에게 대응시키고 있다. 라일리 엄마의 주도 감정이 ‘슬픔이’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융의 표현대로, 이것은 집단무의식의 원형이 반영된 것이다. 슬픔을 형성화한 눈물이란 건, 보통 여성의 전유물로 생각하지 않던가. 남자는 살아생전 딱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는 케케묵은 표현이 지금껏 사용되는 걸 봐도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주인공 캐릭터가 ‘소녀’였기 때문에, 주인공의 슬픔과 눈물을 보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주제에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도 강인한 남성이여만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혀, 슬픔과 눈물을 애써 모른 척했다. 라일리 아빠의 주도 감정인 ‘버럭이’를 품고 있던 것이다. 결국 그 선택이 내 슬픔과 눈물로 돌아올지, 그때는 몰랐다. 


<원인3 : ‘밈’의 차이>  



진정하고, 다시 남성 특유의 냉철한 이성으로 상황을 분석해보자. 여성만이 기호계 안에 존재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뛰어난 공감 능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원래’ 그랬던 것이었을까? 요즘 유행하는 말로, 이건 포스트모던적인 생각이 아니다. 이를테면, 자아를 ‘찾는다’는 말은 본래 자아가 있었음을 의미하는데,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런 생각을 거부한다. 자아는 ‘만들어진다’가 적확한 표현이다. 마찬가지로, 본래 가지고 있는 능력은 없다. 여성의 공감 능력도, 만들어지는 것이다.   


태초의 사회는 모계사회였다. 가족은 아버지 혈통이 아니라 어머니의 혈통을 따랐다. 아니, 따라야만 했다. 직접 낳은 어머니만 알지, 아버지는 누군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미덕은 최대한 많은 남자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하나의 정자가 아이를 만든다는 생각은 비교적 최근의 상식이다. 어머니는 많은 남자들과 관계를 맺어 많은 아버지를 확보해야 했다. 아버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아이에게 득이 되는 건 당연한 거였다. 미국의 인류학자 모건은 이런 원시상태의 결혼을 ‘난혼’이라 표현했다. 이때까지 가족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공동의 무리만 있을 뿐이었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잉여생산물이 생기기 시작했다. 도구의 발견이 가장 큰 역할을 했을 테다.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이 들어섰다. 공동의 무리보다 본인의 것을 챙기기 시작했다. 여기서 신체적으로 강하게 태어난 남성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남성은 남은 생산물을 자신과 닮은 존재에게 물려주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이것은 점점 나의 것, 즉 자신만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욕망이 된다. 이로써 남자와 여자 사이의 계약이 성립한다. 남자는 자신의 아이를 낳아달라고 하고, 여자는 무방비한 임신 기간 동안 자신을 지켜달라고 한다. 결혼이 발명됐고, 모계사회가 무너졌다.  


이때부터 여성의 역할은 아이를 돌보는 일이 되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 못하는 아이의 의중을 재빨리 알아차리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일이다. 이것은  공감 능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점차 시간이 흘러, 이러한 능력은 여성의 필수 요소가 됐다. 즉, 문화 유전자라 일컬어지는 ‘밈(meme)’이 되어 긴 세월 동안 내려온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여성이란 모름지기 이래야만 한다는 집단무의식의 원형이자 ‘아니마’적 요소가 된 것이다.  


반면, 남성은 어땠을까? 남성에게는 이성과 합리가 더 중요시 됐다. 사냥 등을 통한 생존에 있어서 냉철한 판단은 필수였다. 감정에 휘둘리게 되면 더 큰 위협을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감성’의 여성과 ‘이성’의 남성은 원시사회로부터 내려온 유산 같은 것이다. 진화심리학이 지적하는 부분들이기도 하다. 내가 그녀의 눈물을 이성과 합리에 근거해 파악하려 한 노력은 이토록 오랫동안 학습되어 온 것이었다.


<원인4 : 타부(taboo)시 된 눈물>  



사실 눈물은 나약한 존재의 상징이었다. 어렸을 적, 친구와 싸웠을 때 패배의 증거가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코피를 흘리는 것, 다른 하나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모두 알겠지만, 코피보다 눈물이 더 치욕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눈물이 여성과 연결되는 건 우연이 아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아리스토텔레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현자들도 여성의 불완전함을 강조하며 남성과 구별을 두지 않았는가. 여성은 나약하다는 게 고대부터 내려온 인식이었으며, 그것이 눈물로 형상화된 것이다. 나도 모르게 이러한 인식이 내게 내재화되어 눈물을 타부(taboo)시 했고, 그녀의 눈물을 애써 모른 척 했던 것이다.  


눈물을 타부시하게 한 원인에는 멜로드라마도 한 몫 거들었다고 본다. 멜로드라마는 누구의 장르인가? 남성 관객이라고 얘기하는 이는 없을 테다. 남성이라 하면, 스릴러나 액션물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멜로드라마는 여성의 장르다. 아니, 그렇게 인식한다. 멜로드라마를 대표하는 감정이 슬픔이고, 이것을 드러내는 게 눈물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무시당해왔듯, 이성이 결여된 감정적인 눈물도 무시당해왔다. 정신을 강조하고 육체를 등한시하던 서구 사회의 풍조가 있어서다. 질질 짜는 건, 계집애나 하는 거라는 식의 도그마가 형성된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 멜로드라마는 굉장히 진보적이고 사회 비판적인 장르였다. 18세기 시민계급이 등장하며 기존 사회 통념에 벗어나 이성보다 감성을 중시하는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것은 구시대의 계급과 모순을 고발했다. 이것이 점점 보수화되더니, 신데델라와 같은 현실 도피 연애담이 되어버렸다. 이 장르가 영화나 드라마로 넘어오면서 그 양상은 더욱 짙어졌다. 우연적 상황과 비극적 정서를 강조하며 가부장적 헤게모니를 재생산하는 여성 잔혹사 작품으로 전락해버린다. 비련의 주인공이라는 수식어는 곧 여성의 것이 되어 버릴 정도로, 여성은 수없이 핍박받으며 억압받는 존재로 눈물을 한 가득 안고 산다. 이 눈물을 닦아주는 이는 우위에 있는 남성 캐릭터가 된다.  


하지만 영화 <인사이드 아웃>은 슬픔과 눈물의 위상을 재정립한다. 슬픔이란 감정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것을 형상화하는 눈물 역시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 사용된다. 이것은 결코 나약한 것이 아님을 말한다. 오히려 냉철한 이성보다 인간에게 훨씬 중요한 것임을 강조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마따나, 사회적 동물에게 가장 필요한 요소가 슬픔과 눈물임을 이야기한다. 우리 모두가 무시하고 심지어 금기시한 슬픔과 눈물을 다시 보게끔 한다. 슬픔을 곧 여성과 동일시하고, 이것으로 여성이 나약하고 불완전하다는 가부장적 헤게모니를 파괴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를 페미니즘적 영화라고 볼 수도 있겠다.


<답장을 갈무리하며>  



무수히 많이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당신이 극장 안에서 사춘기 소녀였다면, 이 글을 쓰는 동안에 나는 사춘기 소년이었다. 쓰는 내내 설렜고, 수줍었으며, 속이 시원했다. 이 이성적인 작업 안에 약간의 감성이 묻어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것이다.   


당신은 내게 눈물로 기억된다. 그래서 더 아련하다. 짧은 만남이었음에도. 후회는 없다. 인연이란 게 어디 후회로 될 일이던가. 지구상 어느 한 곳에 요만한 바늘 하나를 꽂고, 저 하늘 꼭대기에서 밑씨를 딱 하나 떨어뜨렸을 때, 그 밀씨가 나풀나풀 떨어져 그 바늘 위에 꽂힐 확률. 그 말도 안 되는 기가 막힌 확률이 인연이라 했다.   


라일리를 단순히 캐릭터로만 인식해 거리두기를 했고, 슬픔이란 감정은 여성의 전유물이라고만 생각했고, 그것의 응답인 눈물은 남자라면 절대 보여선 안 되는 것이라 알고 있었다. 그렇다. 구시대적인 생각에 갇혀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러니 밀씨가 바늘에 꽂힐 리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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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marry ann doane, Film and the Masquerade: Theorising the Female Spectator, 1982

laura mulvey, Visual Pleasure and Narrative Cinema, 1975

줄리아 크리스테바, 김인환 역, 『시적 언어의 혁명』 (동문선, 2000)

엥겔스, 김경미 역,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 (책세상, 2007)

리처드 도킨스, 홍영남, 이상임 역, 『이기적 유전자』 (을유문화사. 2010)

유발 하라리, 조현욱 역, 『사피엔스』 (김영사. 2015)

유지나, 『멜로드라마란 무엇인가』 (민음사. 1999)

미셀 푸코, 이혜숙 역, 『성의 역사』 (나남. 2004)

버지니아 울프, 이미애 역, 『자기만의 방』 (민음사. 2006)  


<참고 영화>  

올란도(1993. 감독 샐리 포터)

그들은 대화중(2011. 감독 이민아)

번지점프를 하다(2000. 감독 김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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