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그/그녀에 대한 일상
어쩌면 당신과 마주쳤을지 모를, 그런 날이었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때면 꼭 앞자리에 앉길 좋아하는, 한 번 빠진 영화는 꼭 여러 번 보는,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습관처럼 꼭 그 영화를 틀어놓고 잠을 기다리는, 당신을 말이다. 이따금씩 그 영화 속 대사를 따라해 당혹케 하는, 그래, 당신을 말이다.
당신은 <해리와 샐리를 만났을 때>라는 영화를 참 좋아했다. 밤하늘이 별들 없이도 매섭게 밝다며,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던 그날 밤에도 당신은 어김없이 이 영화를 틀어놓곤 내게 샐리의 대사를 말했다. 해리와 샐리가 처음으로 밥을 먹는 장면에서, 까탈스럽지만 사랑스럽게 주문하는 그 대사를 따라했다.
그러면 나도 해리처럼, 턱을 괴고는 ‘당신은 매력적인 여자 같아.’는 대사를 해야 했다. 내 대사를 기다리는 당신의 동그란 두 눈을 보노라면, 해리의 대사가 아니었어도 나왔을 그런 말이었다. 가만 보니, 당신은 샐리를 닮았다. 키 작은 샐리.
물론 당신은 샐리처럼 까다롭게 주문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라멘 집에 당신을 데려갔다. 당신은 내가 추천한 메뉴를 고민 없이 선택했다. 그리곤 무척 맛있게 먹어주었다. 국물 한 모금 마시더니, 당신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본 남자 배우와 내가 닮았다고 했다.
내가 모른다고 하자, 사진을 보여주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잘생긴 배우라 눈치껏 겸손을 떨었다. 당신은 부끄러워하는 날 보며, 웃었다. 데려온 라멘 집이 너무 맛있어서 그런 거니 부담스러워 하지 말라고. 나는, 그렇다면 라멘을 매일 사줄 수도 있겠다고 했다.
라멘을 먹은 후에는 종종 맞은 편 카페를 갔다. 개인카페 특유의 아기자기함이 느껴지는 그런 곳이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한나 아렌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트럼프의 당선과 박근혜 게이트 등의 국내외 이슈가 몰아치는 지금이라면 더욱 할 말이 많았겠지만, 뭐 그때라고 별반 달랐겠는가. 그때도 열띤 대화가 오고갔다.
나는 하이데거가 되겠다고 했다. 당신은 정색을 했다. 나치 같은 것에 굴복할 거냐고. 그게 아니라, 한나 아렌트와 하이데거의 관계를 이야기한 것이라고 변명하기 바빴다. 당신은 차라리 야스퍼스가 되어 달라고 했다. 당신이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알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날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가 재개봉하던 날이었다. 당신과 함께 갔던 라멘 집에서 라멘을 먹었다. 서점에 들려 한나 아렌트의 책을 끄적이기도 했다. 날이 어둑어둑, 밤하늘이 별들 없이도 매섭게 밝아질 때쯤 극장에 갔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맨 앞자리에 앉아 봤다.
어쩐지 당신과 마주치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