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길고양이에 대한 단상
고양이긴 한데, 앞에 ‘길’이라는 게 붙는 존재들이 있다. 수많은 단어 중에 하필 길이 붙는다. 길은 도처에 있으나 없다. 어디에나 있다면, 그것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에나 있으나 무어라 특정할 수 없는 공간이 바로 길이다. 그 위에 놓인 존재들. 그들을 특징짓는 게 바로 길이다.
이는 떠돌이 고양이를 통칭한다. 한때는 도둑고양이라 불리는 치욕을 겪기도 했다. 지금은 길냥이라고도 불리며 귀여움을 한 조각 내비치기도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길고양이를 상징하는 건, 길이다. 어디에나 있으나 어디에도 없다. 오늘 길가다 마주친 놈도 길고양이고 어제 마주친 놈도 길고양이다. 분명 색깔도 다르고 꼬리 길이도 다를 터인데, 그네들은 하나같이 길고양이다. 그러니 있으나 없다. 길처럼.
어느 한 고양이가 길고양이가 되는 순간, 그 녀석은 어떤 고양이가 아니라 그냥 길고양이 일반이 된다. 이러한 일반성은 차갑다. 개별적이고 개성적인 측면이 소멸한다. 이는 곧 존재를 흐릿하게 만든다. 이름을 상실한 존재. 내가 나일 수 있을까? 멀리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키클롭스’ 에피소드부터 최근에는 웹툰 <신의 탑>이 그리는 ‘더 네임 헌트 정거장’ 에피소드까지가 이런 사유의 총체라 볼 수도 있을 테다.
이 글을 쓰는 와중에 거실 티비 소리가 들렸다. 김하늘 주연의 <공항 가는 길>이라는 작품이었다. 챙겨보는 드라마는 아니지만, 분위기가 괜찮다 싶은 드라마였다. 얼핏 귀동냥으로 들은 내용은 이랬다. 회사를 그만둔 김하늘이 동네 엄마들 모임에 나갔는데, 거기서는 엄마라는 이름만이 존재한다. 어디서 몇 등하는 아이의 엄마. 김하늘이 말했다. 내 존재가 사라지는 거 같아 두렵다고.
니체에 따르면 소유는 곧 소속인데, 우리는 소속됨으로써 정체성을 소유하는지도 모른다. 아니, 소유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디 학교의 학생으로, 너는 어디 회사의 회사원으로, 또 다른 너는 누구의 아빠 혹은 엄마로. 간혹 누구의 아들, 딸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여럿 보았듯이 이 소속감이 가장 삐딱한 결과를 낳는 듯하다. 돈도 실력이라니, 할 말이 없긴 하지만.
이름이 소속된 관계로써 대체되는 건 그나마 양반이다. 물론 이 역시 내 존재의 상실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존재가 사라졌다기보다 다른 것이 덧붙여진 것이다. 문제는 길고양이 같은 존재들이다. 어디에나 있으나 무어라 특정할 수 없게 되어버린 존재. 이들은 ‘사케르’가 될, 아니 그렇게 낙인찍힐 위험이 있다. 웹툰 <신의 탑>에서 이름을 빼앗긴 존재들은 곧바로 사케르 같은 존재가 되어버리지 않던가.
조르주 아감벤이 <호모 사케르>에서 언급한 호모 사케르는 벌거벗은 생명(조에)이다. 보호받지 못하는, 길고양이 같은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더욱 무서운 건, 사케르란 살해는 가능하되 희생양은 될 수 없다는 거다. 이 역시 길고양이의 처지다. 어느 유명 여자 사립대학교 총장의 사퇴는 희생양으로서 그 역할을 하지만, 그 밑의 비정규직의 해고는 그 어떤 영향도 못 미치는 단순한 살해일 뿐이다. 길가다 치이는 고양이를 죽이듯.
길고양이의 정체성은 길로써 대변된다. 그것이 마음 아프다. 삼성고양이나 청와대고양이 정도라면, 부러웠을 테다. 적어도 군대에서 불리는 짬타이거만 돼도 마음이 놓일 법하다. 그러나 길고양이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존재다. 길이라는 게 그런 거니까. 영국의 어느 고양이는 직위까지 있다던데, 너희들은 왜 오늘보고 내일봐도 기억 못할 길고양이가 된 거니? 아니, 우리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