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책에 대한 단상
책은 누구의 것인가? 작가의 것인가? 독자의 것인가? 이것은 작가의 것이기도 하고, 독자의 것이기도 하다. ‘나는’이라고 적지만, 당신은 그것을 ‘내가’라고 읽을 수도 있는 법이다. 신비평의 등장은, 독자의 권력을 인정한 첫걸음이었다. 19세기 영국의 시인 매튜 아놀드가 비평은 공평무사해야 하며, 절대적 객관성을 지녀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작가의 아우라에서 벗어나 텍스트 그 자체로 보자는 말이었다. 그것은 독자의 몫이었다.
‘4월은 잔인한 달’이란 시구로 유명한 <황무지>(1922)의 시인 T.S 앨리엇. 그는 <전통과 개인의 재능>(1917)이라는 에세이를 통해 신비평을 자리 잡게 한다. 리차즈나 윌리엄 엠프슨 같은 미국 남부 출신의 신비평가들은 작가나 기타 외부의 것에 영향 받지 않는, ‘그 자체로서의 텍스트’를 강조하며 쓰는 이의 권력을 읽는 이의 권력으로 이양했다.
이것들은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사유와 맞닥뜨리며, 독자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한다. 프랑스의 평론가이자 철학자이며 기호학자인 롤랑 바르트는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저자의 죽음’을 말한 이유다. 그는 신비평이 텍스트를 바라본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그는 텍스트가 직접적으로 의미를 전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의미화(signification)를 전달할 뿐, 의미(meaning)를 만들어내는 건 독자다.
그는 <기호학의 요소들>(1967)에서 1차 언어와 2차 언어를 언급했다. 1차 언어는 바로 쓰인 텍스트다. 이를테면 지금 읽고 있는 이 글이 바로 1차 언어다. 2차 언어는 이 글을 읽고 독자들이 이 글에 관련해 다시 쓴 글이다. 이때 권력은 2차 언어가 지닌다. 1차 언어는 2차 언어의 글감일 뿐이다. 이 2차 언어를 누군가 읽고 다시 글을 쓴다면, 이 2차 언어는 다시 1차 언어가 되고, 이것에 대해 쓴 글이 2차 언어가 된다. 다시금 권력이 옮겨 가게 된다.
그러니 그가 다음 해에 <저자의 죽음>(1968)을 집필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전통적으로 생각했던, 저자만이 텍스트의 기원을 갖는다는 생각은 이미 파기된 옛 생각이었다. 끊임없이 1차 언어와 2차 언어가 생성되며 그 권력의 주인이 없는 이곳에서, 저자는 죽음을 고할 수밖에 없다. 바르트는 이 책에서 저자는 단지 생각할 장을 열어주는 존재라고 했다. 그 장에서 활동하는 건 독자다. 의미는 작가가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독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책은 나의 것이지만, 당신의 것이기도 하다. 내가 무어라 헛소리를 많이도 지껄여 놨겠지만, 그것은 당신이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내가 ‘너는’이라고 쓴 것을, 당신은 ‘너랑’이라고 읽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생각한 의미가 오롯이 당신에게 다가가지 않을 테니. 그것이 정상이다. 내가 ‘1’을 이야기 했을 때, 당신은 ‘2’를 생각하길 바란다. 그렇게 끊임없이 의미가 확장되었음 한다. ‘라면받침대로 좋을 책’이 당신만의 사유로 가득차길. 그 사유의 끝에는 배고픔이 있을 테다. 라면 하나 끓여 이 책을 꼭 받침대로 사용하며 그 사유를 곱씹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