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책에 대한 상상(일부부만 발췌합니다.)
(일부부만 발췌합니다.)
<그>
하릴없이 시간만 축내고 있었다. 빈둥빈둥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멀뚱히 쳐다봤다. 습관처럼 핸드폰을 만지지만, 더 이상 볼 것도 없었다. 애꿎은 스크롤만 박박 긁어댔다. 그 좁은 침대 위에서 몸을 빙그르 말다가, 다시 천장을 봤다. 누구는 침대에 누워만 있었어도 좌표평면이란 걸 만들어 냈다는데, 내 방 천장은 허여멀겋기만 했다. 하긴, 이 작자 때문에 학교 다닐 때 X축, Y축을 얼마나 찾아 다녔는지. 후세를 편하게 해주기 위해선 나만이라도 아무 것도 안 하는 게 좋을 법도 하겠다. 는 개뿔. 아, 지루하다. 취준생이란 말만 들어도 진저리가 난다. 소설 보면 이상한 악마들도 잘 나타나 영혼을 팔며 부귀영화를 누리던데, 내 영혼은 필요하지도 않다는 거냐. 메피스토펠레스요, 내 영혼 좀 가져가시고 취업 좀 시켜주소서.
응답한 걸까? 엄마가 방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메피스토펠레스가 엄마로 빙의되어 들어왔나 보다. ‘이노무시키야’를 기본 비트로 하는 초절정 디스랩이 시작됐다. 남들과는 다르게, 누구보다 빠르게. 뿌이~ 뿌이~ 뿌이~. 넉 다운이 아니라 넋 다운. 거기 119죠? 여기 엠뷸런스 좀 불러 주세요. 역시나 이번에도 대미를 장식한 엄마의 라임과 플로우는 ‘영어 공부’로 끝이 났다. 알았다고! 알았어! 내가 맞받아친 대사는 이게 전부였다.
내 지갑만큼이나 비어있는 가방을 들쳐 메고 집 밖으로 나왔다. 그놈의 영어. 조선시대에는 중국말 배우느라 한 평생,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말 배우느라 한 평생, 이제는 영어 배우느라 한 평생이구나. 아스팔트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작은 돌덩이만 걷어찼다. 힘껏 가래를 모아 침을 뱉었다. 에이, 멀리 날아가지도 않네. 밤에 타이타닉이나 다시 보면서, 디카프리오의 침 멀리 뱉기 강습을 정독해야겠다.
학교 도서관에 도착했다. 나만 빼고 다들 열심히구나. 토익 책이 있는 곳으로 갔다. 다 토익만 공부하나. 어떻게 책 한 권이 안 남아 있냐. 한편으론 애잔했다. 다들 나만큼이나 책 살 돈도 없는 모양이구나. 아, 이 시대의 청춘들이여.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모바일 검색을 했다. 한 권이 반납된 걸로 떴다. 근데 왜 안 꽂혀 있는 거냐고.
데스크에 갔다. 책을 문의하니까, 막 뭐 하는 척을 했다. 팔짱을 끼고 지켜봤다. 가만히 보니, 약간 귀엽게 생겼다. 몇 학번일까? 한참 어리겠지? 취직도 못한 내 놈이 그딴 생각해서 뭐하냐. 머리를 흔들며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하는 순간, 데스크 학생이 책을 찾아줬다. 마침 한 권이 반납됐다고 했다. 방금 반납된 거라 아직 서가에 꽂히지 않은 거라고. 알겠다며 빌리겠다고 했다. 학생증을 내밀며 손이라도 스쳐볼까 했는데, 쉽지 않았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구나.
책을 빌려 지하 독서실로 향했다. 다시 한 번, 나만 빼고 다들 열심히구나. 한숨을 깊게 내쉬고 책을 책상 위에 올렸다. 옆에서 툭툭 쳤다. 피부가 하얀, 그래서 검정 뿔테가 더 도드라져 보이는 사람이 나를 쳐다봤다. 머리를 질끈 묶은 모양새가 영락없는 새침데기였다. 검지를 입술에 올리는 시늉을 했다. 닥치라는 거였다. 아씨. 한숨도 못 쉬냐. 이 공기가 다 너 꺼냐.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고개를 꾸벅 숙일 뿐이었다. 아, 생각할수록 열 받네. 내가 취직하면 넌 죽었어, 아주 그냥. 얼핏 보니까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거 같았다. 너 같은 놈들이 공무원을 하니까 이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다 자식아. 아량이라곤 한 푼도 없는 자식아.
옆자리 그 아량 없는 자식한테 또 지적당할까, 최대한 조심스럽게 가방에서 펜을 꺼냈다. 그리곤, 열심히 RC부분을 풀려고 했으나... 엔간히 눈이 감겨왔다. 방금까지 침대 위에 있었는데. 침대에 누워있으면 잠이 안 오는데, 책상에 앉아만 있으면 졸음이 쏟아졌다. 꾸역꾸역 3문제까지 왔다. 아예 이해도 되지 않는 문제였다. 왜 돈이 셀 수 없는 명사인 거지? 만 원, 이만 원, 충분히 셀 수 있는데 말이지. 이해가 안 되자 그냥 자기로 했다. 결국 3번까지 풀고, 내 의식도 풀었다.
얼마나 잤을까? 내가 푼 문제보다 내가 흘린 침이 더 많았다. 입 주변을 소매로 닦아냈다. 주변을 둘러봤다. 나만 빼고 다들 열심히구나. 옆자리 그 여자는 밥을 먹으러 갔나? 짐은 그대론데, 자리만 비어있었다. 덕분에 눈치 안 보고 기지개를 폈다. 입맛을 다시고, 토익 책을 다시 봤다. 흰 것은 종이요, 까만 것은 글자이니 그것을 누가 모르리요.
책을 푸드득 거리며 훑었다. 훑으면서 나오는 바람으로 잠이나 좀 깨볼 요량으로. 몇 번 반복하는데, 중간에 반짝거리는 금빛이 보였다. 동공의 확장. 이런 것이 인체의 신비일지도. 그 부분을 펼쳤다. 이게 웬 일. 찬란한 노란색이 눈이 부셨다. 신사임당이 늠름하게 들어있는 5만 원 권 지폐 한 장이 들어 있었다.
BAAAAAAM! 순간 방언이 터질 뻔 했다. 이것은 은총이었으니. 장소가 장소인 만큼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 은총을 뚫어져라 봤다. 심하게 빳빳했다. 신권 중에 신권이었다. 밑에 무어라 적혀 있었다. ‘힘내라, 유미야.’ 정갈한 글씨체였다. 속으로, 덕분에 힘이 납니다! 라고 외쳤다. 몸을 최대한 웅크린 채 5만 원 권 지폐를 재빨리 내 주머니 속에 넣었다.
공돈이 생겼을 때, 가장 생각나는 건 역시 술. 벌써부터 침이 고였다. 단톡방에 ‘술 한 잔 하자’라고 보냈다. 숫자는 주는데, 누구하나 대답하지 않았다. 후... ‘술 쏜다.’ 라고 다시 보냈더니, 이 반응 속도는 가히 광대역 5G로구나. 나도 나지만, 너네는 더 징글징글하다.
짐을 챙겨 나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그 옆에 놓여 있는 쇼파에 누가 웅크린 채로 통화하고 있었다. 머리를 질끈 묶은 모양새가 내 옆자리 그 사람이었다. 5층에서 내려올 생각을 안 하는 엘리베이터를 향한 기다림이 무척 지루했다. 쇼파 쪽으로 몇 걸음 다가갔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놀래라. 그렇게 갑자기 고개를 들면 어떡하나. 눈이 마주쳤다. 눈이 빨갰다. 손으로 재빨리 양 볼을 닦아냈다. 그녀는, 뭘 봐요?라며 퉁명스런 목소리로 날 민망하게 하며 일어났다. 일어나봐야 별로 크지도 않은 게 일어나 눈을 부라렸다. 난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그녀>
새벽부터 일어났다. 어차피 잠도 오지 않았다. 학교를 졸업한 지 꽤 됐음에도 학교 근처 자취방을 떠나질 못했다. 화장은 사치. 머리를 질끈 묶고, 뿔테 안경을 대충 걸친 뒤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중에 오늘 반납해야 할 토익 책을 놓고 와, 다시 집에 들렸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구나. 하긴, 언제는 있었던가.
지난 달 집에 내려갔을 때, 아버지는 내게 5만 원을 주셨다. 방금 막 은행에서 받아온 거 같은 새 것이었다. 정년이 지나 이제 벌이도 없으실 텐데, 이건 또 어디서 나셨데. 알바하니까 괜찮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끝끝내 내게 그 빳빳한 5만 원을 건네주셨다. 돈 같은 거 신경 쓰지 말라고. 공부에만 집중하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지만, 그렇지 못해 미안하다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셨다.
나는 아버지를 또 죄인으로 만들었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 없었다. 몇 시간 있지도 않고, 집을 나왔다. 하룻밤이라도 자고 가면 안 되겠냐고 하는 아버지의 울림을 무시한 채.
국가직 공무원 영어 시험이 토익 점수로 대체한다고 했다. 서점에 들려 토익 책을 둘러봤다.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그 주름살 하나 없는 5만 원이 선뜻 꺼내지지 않았다. 그때서야 5만 원 밑에 적혀 있는 아버지의 글씨를 발견했다. ‘힘내라, 유미야.’ 이 돈은 더 이상 교환 수단의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학교 도서관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 너덜너덜해진 토익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소중한 5만 원을 사이에 끼어 넣었다. 내 행운의 책갈피. 아버지의 응원과 나의 소망이 함께 하는 책갈피. 그것만으로도 토익 점수가 오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지 2주가 지났고, 이제 반납해야 했다. 시험은 아직 며칠 남았지만.
책을 반납하고 지하 독서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그다지 유쾌하진 않았다. 늘상 하는 책 반납인데, 왜 이렇게 석연치 않은지 모르겠다. 내가 괜한 의미를 많이 부여해서인가? 이런 잡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얼른 하나라도 더 봐야한다.
그렇게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고 공부하고 있는데, 어떤 인간이 옆에서 계속 한숨을 내셨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참았을 일이었다. 어느새 내가 그를 툭툭 치고 있었다. 조용히 해달라는 몸짓을 했다. 그가 머리를 꾸벅 숙였다. 괜히 미안했다. 여기서 한숨 안 나오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어.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군 게 아닌지, 더 신경 쓰였다. 그 사람도 토익 공부를 하는 거 같았다. 하긴, 여기 앉아 있는 사람 절반은 토익 공부하는 사람이겠지만. 힘내세요. 라고 속으로 말했다. 그 사람에게도, 나에게도 하는 그런 응원이었다.
내 응원이 무색하게, 옆자리의 그 사람은 벌써 잠과의 사투에서 패배를 했다. 옆사람이 자니, 나도 졸음이 몰려왔다. 아버지가 주신 5만 원을 꺼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걸 보면 잠이 확 달아나니.
없다. 아뿔싸. 책에 꽂아 놓고 그대로 반납했다. 식은땀이 났다. 바로 일어나 토익 책을 반납한 3층 인문과학정보실로 갔다. 벌써, 벌써 누가 빌려갔다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누가 빌려갔는지 사정사정해서 물었으나, 개인정보기 때문에 말해줄 수 없다고만 했다. 대신에 자신들이 문자를 보내 확인해주겠다고 했다. 우선 그 말만 믿고 나는 구구절절한 쪽지를 남겼고, 다시 지하로 내려갔다. 때마침, 아버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아버지의 당황한 목소리를 듣고도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이게 뭐라고, 왜 이렇게 슬픈 거야. 그까짓 5만 원이 도대체 뭐라고, 이렇게 슬픈 거냐고. 그까짓 5만 원이 아니니까, 이렇게 슬픈 거겠지.
그저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너무 걱정 말라고 했다. 그때 그냥 그렇게 가버려서 너무 죄송하다고. 아버지도 눈물을 흘리는 거 같았다. 아니, 울었다. 그렇게 숨죽여 부녀가 울었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었다. 깜짝 놀라는 그 남자가 있었다. 내 옆자리에서 한숨을 내쉬던, 잠을 자던 그 남자가 있었다. 재빨리 눈물을 훔쳤다. ‘뭘 봐요?’ 내가 생각해도 너무 퉁명스런 말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