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졸업에 대한 상상
오늘 병관씨가 졸업을 한단다. 긴 시간이었다. 군대도 다녀오고 휴학도 두어 번 했으니, 거진 8~9년만 인 거 같다. 너무 늦게 졸업하는 거 아니냐고 물으면, 요즘은 다들 그렇게 한다고 얼버무리는 병관씨다. 자기보다 높은 학번들도 아직 학교를 다닌다고 한다. 내 걱정이나 하라며 어깨를 두드리는 병관씨다.
그러면서 병관씨는 진지한 얼굴로 말한다. 지구상의 모든 물체가 중력에 따라 아래로 떨어지듯, 사실 지구도 우주 공간 아래로 끊임없이 떨어진단다. 지구만 떨어지는 게 아니라 그 옆에 달도, 태양도, 수성도, 금성도, 목성도, 모든 게 같이 떨어지고 있어서 모를 뿐이라고 말이다. 오늘도 어김없는 병관씨의 뜬금없는 말이다. 내가 갸우뚱하자 됐다고 하는 병관씨다.
병관씨는 오늘도 어김없이 소변을 보기 전에 손을 먼저 씻는다. 병관씨는 오줌을 싸고 나서 손을 닦는 걸 문명인 취급하는 모습이 꼴 같지 않다고 열변을 토한다. 지 손이 더 더러우면 더 더럽지, 내 소중한 거기가 더 더럽겠냐며 말이다. 손을 씻으려면 오줌 싸기 전에 하는 게 맞단다. 손으로 얼마나 지저분한 짓을 많이 하냐며. 그러면서 지퍼를 올리고는 바로 나가버리는 병관씨다.
병관씨가 몇몇 아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다. 소싯적 추억에 싱글벙글이다. 별안간 병관씨 표정이 굳어진다.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소리치는 병관씨. 누군가 그때 그 일은 미안했다고 하자, 병관씨는 미안하다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싫다고 한다. 무조건 고맙다고 하라고. 그때 그래서 미안하다가 아니라, 그때 그 일이 있었는데도 웃어줘서 고마웠다고 말이다. 약속 시간에 늦어서 미안한 게 아니라, 늦었는데도 기다려줘서 고맙다고. 번거롭게 해서 미안한 게 아니라, 그걸 참아줘서 고맙다고 말이다. 당신을 미안하게 하고 싶어서 한 일이 아니라며. 그렇다고 소리까지 칠 일인가. 유별난 병관씨다.
내가 잠깐 자리를 뜨자, 병관씨의 문자가 온다. 어디냐고 묻는 병관씨의 문자에 ‘그쪽으로 곧 갈게.’ 라고 보내자, ‘ㅡㅡ’ 눈 찢은 이모티콘을 보내는 병관씨. ‘간다’고 하지 말란다. ‘온다’고 말하라고. ‘간다’고 하는 건 마치 떠나는 거 같다고. ‘온다’고 하는 게 훨씬 따뜻하다고. ‘그쪽으로 곧 올게.’는 뭔가 어색하지 않냐고 해도 병관씨는 막무가내다. 자기 마음대로 언어를 바꾸는 병관씨. 국어 교사 임용고시에 떨어진 게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병관씨에게 가니, 나를 툭툭 치며 한 여자를 가리킨다. 자신이 좋아했던 여자였다고 말한다. 병관씨의 새삼스런 모습이다. 어디가 그렇게 좋았냐고 묻자, 꼴 보기 싫게 눈은 왜 감는지. 자기 이상형은 너무나 구체적인데, 거기에 꼭 맞은 여자란다. 병훈씨의 이상형은, 고기 굽는 여자다. 처음 같이 밥 먹는 날 저기 있는 저 여자가 먼저 집게를 들고 고기를 구웠단다. 육즙을 살리는 그 손놀림과 정갈한 가위질. 김치와 마늘의 적절한 조화에 온몸이 찌릿했다며, 더 꼴 보기 싫게 두 손까지 모으는 병관씨다.
병관씨는 막걸리를 참 좋아한다. 오늘은 특별한 걸 먹겠거니 했지만, 역시는 역시. 자주 가던 파전집이다. 때마침 날이 흐렸으니, 더할 나위 없는 막걸리행. 속리산 주전자 막걸리 한 잔에 그렇게 행복해한다. 한 잔을 시원하게 비운 병관씨가 파전과 막걸리 찬양에 나선다. 이렇게 날이 흐린 날에는 일조량이 부족한데, 그러면 우리 몸의 세로토닌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부족해진단다. 세로토닌은 심리적 안정감과 만족감을 주는 호르몬이라나 뭐라나. 이 세로토닌을 구성하는 아미노산과 비타민B가 밀가루에 많이 있으니, 이런 날 파전을 먹어야 한단다. 또 막걸리 안에는 항암 물질인 스쿠알렌과 파네졸이 있다는데, 이걸 기억하고 있는 내가 신기할 지경이다. 이 스쿠알렌 함량이 포도주보다 훨씬 많다며, 다시 막걸리 한 잔을 비우는 병관씨다.
병관씨가 벌떡 일어난다. 약간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어디론가 마구 걸어간다. 아니, 뛰어가는 건가?
“병관씨! 어디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