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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깨비 Feb 01. 2017

그것은 봄이었으니

#14-3 끝에 대한 일상



봄이 싫다. 어쩌자고 벌써 왔는지.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이 찬란한 빛을 내리쬐어 주는지, 이 살랑이는 숨결로 날 감싸주는지. 분에 넘치는 성은을 못 견디겠다.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귀에 딱지가 나도록 외웠던 ‘안분지족’이라는 사자성어. 나도 내 분수를 아는데, 이렇게 분에 넘치는 호사는 오히려 나를 힘들게 한다. 저 따사로운 햇살이 나를 몽롱하게 만들고 저 포근한 바람이 나를 잠들게 한다. 목가적인 삶에 도취된 가즈러운 난봉꾼 같으니라고.     


봄은 저주다. 정확히 말하자면 봄의 축복을 깨닫지 못하는 내가 저주스럽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것이 권리인 줄 안다고 하지 않던가. 봄의 축복은 당연한 것이다. 일주일에 삼일 정도만 추울라 치면 어김없이 봄을 욕한다. 무슨 봄이 이러냐며 역정을 낸다. 나머지 사흘은 우리를 따스하게 보듬어 주어 것만, 그 고마움은 알지 못한다. 당연한 봄의 축복, 그것은 나를 배은망덕하게 만드는 저주다.     


태초에 에덴동산이 있었다. 모든 것이 풍요로운 그곳은 봄이었다. 그들이 부르는 대로 그것들의 이름이 되듯, 그것들은 그들이 부르는 대로 아름다웠다. 봄은 모든 것을 그들에게 주었다. 푸생이 자신의 작품 <사계>에서 아담과 이브가 존재하는 에덴동산의 삶을 봄으로 표현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푸생이 <사계>에서 의도했듯, 에덴동산은 새 삶의 탄생과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봄이었으니.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모습이 마냥 좋았다. 행복해하며 잘 자라는 모습을 바라만 봐도 좋았다. 우리네 엄마가 그러듯. 한 선지자만은 알았다. 그분의 맹목적인 사랑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랬다. 아담과 이브는 그분께서 주신 풍요로운 삶에 도취되어 소위 생각 없는 삶만 살고 있었다. 선지자는 그들을 각성시켜야 했다. 그것이 그분에게도, 그들에게도 행복한 일이 될 테니.     


선지자는 그들에게 ‘선악과’라는 깨달음의 열매를 쥐어준다. 그들은 이것을 먹고 서야 비로소 그분의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다. 그들은 지금껏 당연시해왔던 것들의 소중함을 느낀다. 이제 그들은 그분의 품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모든 것이 풍요로웠던 에덴동산의 봄을 뒤로 한 채. 이제 그들은 무더위와 거센 폭우, 혹은 강렬한 추위를 겪게 될 것이다. 어머니처럼 따스한 봄의 손길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대신에 그들은 ‘성숙’을 얻을 것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역사’가 만들어질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는 에덴 이후부터 시작되지 않던가?    


엄마는 봄을 닮았다. 아니, 봄은 엄마를 닮았다. 그들은 새 생명을 낳는다. 새 생명에게 그들은 아낌없이 준다. 무엇하나 바라지 않는다. 마냥 주기만 할 뿐. 바라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저 잘 자라기만을 바란다. 봄의 그것이 자연의 순리이듯 엄마의 그것 역시 자연의 순리인가 보다. 인간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그것이기에, 엄마는 자연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엄마는 봄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녀의 생일날이었다. 붉은 노을빛이 검게 물들고 가로등이 새록새록 피어나 그 검은 여백을 수놓고 있었다. 그날도 처음처럼 참이슬이 되게 하시리라는 주(酒)님의 말씀에 따라 방탕의 순례 길을 나서고 있었다. 그때 아빠에게 문자가 왔다. ‘아들 오늘 엄마 생신이니까 일찍 들어와라.’ 아빠는 일 때문에 조금 늦는다며 나에게 귀가 재촉을 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오늘이 그녀의 생일날이었다는 것을.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앉은 자를 일어나게 하시고, 수줍은 자에게 용기를 주시는 주(酒)님의 기적을 뒤로 한 채 도착한 집은 어두웠다. 거실 불 하나만 덩그러니 켜져 있었다. 소파에 쭈그려 앉아 졸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학생 300명의 음식을 아침 아홉 시부터 오후 네 시까지 만들고 온 고단함인지, 아들의 늦은 귀가에 대한 지침인지 모르겠으나 그녀는 소파에 기대어 힘없이 졸고 있었다. 마치 독백의 장면을 강조하는 조명처럼, 거실 불은 그녀만을 조명했다. 나는 현관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한동안 그녀의 모습만 바라봤다. 그녀의 숨소리만 집안의 정적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녀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아직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은빛으로 가득 찬 엘리베이터 안에는 침묵만이 있었다. 차가운 공간을 휘감는 침묵을 엄마가 은빛보다 더 차가운 말로 해체시켰다. “아들, 엄마 오후에도 이제 일하려고. 요 앞 식당인데, 가깝고 사람도 많지 않아서 안 힘들 것 같아.” 집에 다섯 시에 도착하니까 여섯 시에 출근하면 딱이라며 해맑게 웃는 그녀였다. 거울은 그런 엄마의 모습을 뭐가 좋다고 담아내는지. 사방의 거울이 그녀의 모습으로 가득 찼다. 봄비는 가늘게 내리지만 한없이 깊이 적신다는 어느 시인의 구절만 떠올랐다. 엄마. 엄마. 엄마. 나는 새어나오는 한숨을 들이키고 말했다.     


“엄마... 병원비가 더 나와.”    


거울 속에 담긴 그녀의 퀭한 눈빛과 주름들. 그것은 선악과였다. 당연한 줄 알았던 그녀의 희생. 그것은 봄이었으니. 다만 봄이 일 년에 한 번씩 꼭 찾아온다면, 그녀는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쏟아내고 장렬히 전사한다. 그녀의 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니, 모든 것을 짜내려고 한다. 자신이 낳은 새 생명을 위해 봄이 줄 수 있는 그 어떠한 것도 남길 없이 주려고 안간힘을 쓴다.     


엄마가 싫다.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끝없는 사랑을 주는지, 말 못할 희생으로 날 감싸주는지. 분에 넘치는 그녀의 봄을 견딜 수가 없다. 아, 주여. 이 찬란한 봄이 신기루라 말해주소서. 당신의 봄이 곧 끝날 것임을 깨닫게 해주소서. 당신은 봄과 같으나 봄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소서. 당신의 사랑은 봄의 그것보다 숭고하나 영원하지 않음을 알려 주소서. 목가적인 삶에 도취되어 생각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이 저주에서 해방시켜주소서. 선악과를 힘차게 베어 물게 하소서.    


그것은 곧 봄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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