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커피에 대한 단상
엄마랑 아빠랑 케이크에 커피를 먹는, 흔치 않은 그런 날. 엄마가 물었다. 케이크하고 커피는 전 세계적으로 먹는 거 같은데, 떡이나 우리나라 전통 차는 왜 안 그렇지? 라고. 그러게 말이다. 우린 커피를 마신다. 보통 다 그렇다. 수정과도 아니고, 식혜도 아니고 커피를.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이, 오히려 일상이 되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는 속담이 떠오를 만큼. 언제나 그랬듯, 난 엄마에게 무심히 말했다.
우리나라가 약하니까 그런 거 아니겠냐고.
약하고 강하고의 표현이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겠다. 여전히 서구의 것이 헤게모니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린 아직도 종종 오리엔탈리즘으로 치부되는 바, '약하다'는 위험한 표현을 감수하고 적어본다. 서구의 기념일을 챙기고 그들의 문화가 일상이 된 까닭이다. 커피가 그 대표적인 게 아닐는지. 중국이나 중동 권력이 유럽에 역전당하지 않았다면, 커피 대신 자스민차를 먹었거나 예수님 탄생 대신 마호메트의 탄생을 기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서구의 지배 이데올로기 아래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이상하지 않다. 인식 못할 지라도, 그것이 서구의 것일 때가 종종 있다. 19세기와 20세기에는 그것이 정치권력으로 눈에 드러났다면, 오늘날에는 문화 권력으로 탈바꿈되어 교묘하게 침투해 있다. 이러한 논의를 포괄하는 게 오늘날 가장 핫하다는 포스트식민주의다. <오리엔탈리즘>이란 책을 집필한 에드워드 사이드와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의 번역과 해설서로 일약 스타가 된 가야트리 스피박이 있었던 콜롬비아대가 인문학의 성지가 된 이유며, 하버드대가 그토록 호미 바바를 데려오려고 했던 까닭도 바로 포스트식민주의 담론을 선점해 콜롬비아대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보통 이 담론의 시작을 프란츠 파농에서 찾는다. 알제리 사람으로 탈식민주의를 주창했다. 알다시피 알제리는 오랫동안 프랑스 지배 아래 있지 않았던가. 독립도 우리나라보다 훨씬 늦다. 그는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라는 책을 통해 흑인 스스로가 흑인의 문제점을 진단하는 획기성을 보여준다. 본래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이었으나, 반려 당해 후에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이것은 포스트식민주의 담론의 모체가 된다. 정신분석학자답게 정신분석학 관점으로 알제리 피식민자와 프랑스 식민자를 분석한다. 그는 식민지배라는 특수한 상황이 양쪽 모두의 정신을 붕괴한다고 진단했다. 일종의 애증 때문이다. 우리가 일본을 싫어하면서도 일본 문화를 동경하는 것이 대표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9년 뒤에 출간한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이란 책에서는 무력 투쟁을 옹호하며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에 참여하기도 한다. 재밌는 것은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 있던 학자 중 한 명이었던 사르트르가 이 책의 서문을 써줬다는 것이다. 그 다음 해인 1962년, 알제리는 독립한다.
이 포스트식민주의가 본격적으로 논의가 된 것은 앞서 언급한 팔레스타인 출신의 에드워드 사이드의 노력 덕분이다. <오리엔탈리즘>은 이미 고전 중에 고전이 되었다. 여기서 그는 동양에 대한 서양인의 관심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자기 정체성을 증명하기 위함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진짜 동양은 없다. 그야말로 동양화된 동양만 있었을 뿐이다. 이것은 일종의 헤게모니를 구성하며 동양인에게도 침투했다. 동양인 역시 동양을 동양화하여 바라본 것이다. 사이드는 이것을 지적하며 식민주의 사고관을 비판한다. 이미 수천 년 전에 노자가 도덕경에서 언급한 사유기도 하다. 바로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의 사유. 언어에 의해 한 사물이 개념화되고 고정화된다는 것은 한 대상을 차별적으로 이해한다는 것. 결국 언어는 인위적 사유의 결정체로서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존재의 껍데기만을 담아낸다고 인식했다.
가야트리 스피박은 그를 대신해 포스트식민주의 담론을 이끌고 있다. 그는 가장 타자화된 존재다. 인도출신 여성학자로, 유색인종이면서 여성이니 말이다. 그는 안토니오 그람시가 검열을 피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대신 사용했던 서벌턴(하위주체)이란 용어의 개념을 확장시키며 포스트식민주의 담론을 발전시킨다.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가 바로 그것이다. 탈식민주의의 궁극적 목적은 피식민주의 민중, 즉 서벌턴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서벌턴은 포스트구조주의 관점의 용어다. 어느 한 존재를 규정하는 게 아니라, 계속 확장되는 개념이다. 성(性) 사회에서는 여성이 서벌턴이고,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프롤레타리아가 서벌턴이듯 그 범주가 상대성을 띄며 계속해 확장되고 변화된다.
콜롬비아대에게 빼앗긴 명성을 되찾기 위해 하버드대가 초빙한 호미 바바는 비교적 온순한 포스트식민주의 담론을 펼친다. <문화의 위치>라는 책이 대표적이다. 그는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구분과 대립을 해체시킨다.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포스트구조주의 입장에서 해석한다. 여기서 그 유명한 ‘혼종성hybrity’개념을 내놓는다. 그가 말하는 혼종성은 일종의 문화적 잡종으로, ‘차이’를 바탕으로 하나의 동일성이나 총체성으로 포섭되거나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끊임없이 경합하고 협상하는 지속적인 과정을 말한다.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벗어나 혼합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얄팍하디 얄팍하게 포스트식민주의를 대략적으로 훑어봤다. 방금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관계가 뒤바뀌었었더라면, 커피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마셨을지도 모르겠다. 파농이 지적했듯이, 우린 지배 이데올로기에 반감을 가지면서도 동경하는 분열된 감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지배층이 되었든 자신의 우월한 정체성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들의 것을 끊임없이 강요하고, 종국에는 피지배층 역시도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고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지 않았던가. 서벌턴은 자연스럽게 이것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호미 바바가 연구한 것처럼, 이로써 자국문화와 타문화는 구분되지 않고 사이-속(in between)공간이 되는 혼종을 낳으니 말이다. 내가 지금 별다른 생각 없이 마신 것이 자스민차가 아니라 커피인 이유다. 나는 내일도 아마 아무런 의심 없이 자연스럽게 커피를 마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