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커피에 대한 상상
겨울답지 않은 화창한 아침이었다. 괜스레 지구 온난화가 걱정될 정도로, 어울리지 않은 포근함이 가득 찬 거리였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괜히 눈을 지그시 감고 하늘을 쳐다보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마침 오전 강의도 휴강이라 기대치 않은 여유로움까지 만끽하고 있었다.
매일 가던 역 앞에 카페를 가는 길이었다. 그 근처를 배회하고 있는 한 노숙자를 지나쳤다. 코끝을 찌르는 냄새가 풍겼다. 나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다행히도, 내 기침 소리보다 그의 뱃속에서 들리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더 컸다.
카페에 들어가 늘 먹던 아메리카노와 샌드위치를 시켰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창문 밖을 쳐다봤다. 아까 무심코 지나쳤던 그 노숙자가 보였다. 핏기 없는 핼쑥한 얼굴이 아까 들었던 꼬르륵 소리를 더욱 생각나게 했다. 더벅더벅 뒤덮인 수염과 누덕누덕해진 옷가지들은 그것을 더 적나라하게 상기시켰다.
그를 가만히 보다가, 다시 카운터로 갔다. 커피와 샌드위치를 추가로 주문했다. 그리곤, 밖으로 나갔다. 그에게 말을 걸고자 했으나, 쉽사리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선의를 베푸는 건데도, 막상 말하려니 민망도 하면서 괜한 오지랖은 아닌지 싶은 걱정도 들었다. 몇 번을 망설이다, 꾸역꾸역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괜찮으시면, 들어가셔서 커피하구 샌드위치 좀 드시겠어요?”
그의 말똥한 눈동자만이 꿈뻑꿈뻑거렸다. 어차피 주문까지 다 한 거, 무작정 그의 손목을 잡고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마침 진동벨이 울렸다. 나는 그를 창가 쪽 자리에 앉히고 음식을 받아왔다. 그가 손사래 치며 다시 나가려고 했다. 나는 이렇게 예쁜 여대생이 먼저 커피 마시자고 하는 경우가 얼마나 드물지 아냐며, 그를 한사코 자리에 앉혔다.
샌드위치를 감싸고 있던 포장지를 반쯤 벗겨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그의 손이 떨렸다. 그가 눈물을 보였다. 오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 정도는 되었다. 내 손은 이 상황을 어쩔 줄 몰라 허공을 방황하고 있었다. 나는 커피 한 모금 드시라며 김을 모락모락 풍기는 커피잔을 앞에 놓았다. 그는 그제야 눈물을 훔치며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그는 말없이 눈물과 함께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양상추의 아삭거리는 소리가 그토록 경쾌할 수 없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그런 그를 보았다. 거리에서 그에게 풍겼던 불쾌한 향보다 커피의 진항 향이 더 강하게 풍겼다. 그는 샌드위치를 다 먹고,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내게 고맙다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덕분에 혼자 청승맞게 점심을 먹지 않아서 오히려 좋았다며 그의 감사에 화답했다. 그때 그의 미소를 보았다.
중년 남성이라고 하기에는 젊어보였다. 그런 그의 사연을 듣고 싶었지만, 실례가 될까 말을 아꼈다. 그는 연거푸 감사의 인사를 했다. 부담스러워 잠깐 화장실을 간다고 일어났다. 그가 펜을 하나 빌려달라고 했다. 나는 흔쾌히 가방에서 펜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펜을 받은 그는 또다시 기분 좋은 미소를 띠었다.
화장실을 다녀오니, 그는 없었다. 다만 아까 빌려주었던 펜과, 그 옆에 무어라 적힌 냅킨이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따뜻한 커피.
맛스런 샌드위치.
잊지 않겠습니다.
사실 오늘 죽으려던 참이었습니다.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었거든요.
하지만, 당신 덕분에 살 이유가 생겼습니다.
오늘의 선물,
당신께 보답하겠습니다.
꼭 살아서.’
*어떤 실화를 듣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