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끝에 대한 상상(일부분 발췌)
(일부분 발췌)
태어나지 않는 게 최선이고, 태어났다면 바로 죽는 게 차선이다. 염세로 물든 쇼펜하우어가 한 말이라고 하는데,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불교에서도 삶을 일체개고(一切皆苦)라 하지 않던가. 일체가 다 고통이라는 말이다. 하여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업보의 다름 아니다. 카르마라 불리는 업을 다했을 때, 비로소 태어나지 않을 수 있다. 마를렌 고리스 감독의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1995). 이 영화 내에 철학자라고 할 수 있는 크록핑거는 이렇게 말한다. “생명을 탄생시키는 냉혈적인 범죄를 꼭 저질러야겠니?”
생명의 탄생이 냉혈적인 범죄라니? 생명의 경이. 탄생의 신비. 이것들의 아름다움만 강조 받던 우리였다. 그의 대사는 ‘삶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압박감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어느새 우린 삶은 아름다워야만 한다며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지 않던가. 수저론을 극복하기 위한 우리의 발버둥은 오히려 박탈감만 선사할 뿐이었다. 모두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신화는 그렇게 우리를 옥죄었다.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자유와 기회가 가득한 이 시대에, 궁핍함의 문제는 바로 너라며. 이에 대한 답례로 우린 비아냥거리며 ‘노오력’을 외쳐댔다. 노력해도 바뀌는 거 하나 없지 않냐며 말이다.
이런 니힐리즘, 그러니까 허무주의와 염세주의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사건인 세계대전 이후에 팽배했다. 크록핑거의 이런 사유도 세계대전에 신물 났기 때문이다. 일찍이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바, 세상은 신의 자리를 대신할 무언가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기존의 가치가 죽었으니 새로운 가치가 나타나 세상에 희망을 줘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니체의 표현으로 세상은 중간상태(Zwischenzustand)였다. 그곳이 비어 있으니, 수많은 사람들이 니힐리즘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 중간상태를 자본주의가 채우는가 싶었으나, 이것은 곧 물질만능주의로 변질되어 다시금 세상이 일체개고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고 있다. 어떤 유명인의 말마따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니?’식의 사유가 팽배해지는 까닭이다.
손을 대는 것마다 황금으로 바뀌는 미노스 왕이 디오니소스의 시종인 현자 실레노스에게 물었다. “인간에게 가장 좋고 훌륭한 것이 무엇입니까?” 실레노스의 답이 바로 이 글의 맨 첫 문장이다. 태어나지 않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 무가 되는 것이 최고고, 태어났다면 바로 죽는 게 최선이다라는.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언급한 일화다. 이 말이 계속 맴도는 이유는 무엇일까? 니체는 자신 내부의 긍정적인 힘에의 의지로 이러한 니힐리즘을 극복하길 촉구하지만, 위로가 되지 않는다. 결국, ‘노오력’의 다름 아니지 않는가?
우린 세상에 던져졌다. 누구하나 선택해서 이곳에 온 자는 없다. 쇼펜하우어 말마따나, 이곳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것만 모여 있는 세상이다. 그런 곳에 우린 던져진 것이다. 어쩌면 이곳이 지옥인지도 모른다. 우린 ‘태어나지 않을 권리’조차 부여받지 못한 죄인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곳에서 행복의 감정을 느낀다는 게 정신병이다. 고통 받기 위해 만들어진 곳에서 행복을 느끼다니. 미쳐도 한참 미쳤다. 이곳에서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진리가 있다면, 우린 모두 고통 받을 운명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단 하나, 이곳을 벗어나는 일이다. 냉혈적인 범죄의 희생양들이여! 최선이 못되었으니, 차선을 택하자!
-냉혈적인 범죄의 희생양들에게 고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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