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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깨비 Feb 01. 2017

끝의 양가성이 주는 찌질한 용기

#14-1 끝에 대한 단상



끝이란 단어는 늘 양가적인 감정을 일 게 한다. 많은 표현을 고민했으나, 양가적이다는 표현이 가장 적확한 듯하다. 상반적인 것이 공존한다는 게 양가적인 것인데, 끝이란 단어가 주는 뉘앙스가 꼭 그렇다. 끝이란 말을 들으면 두려우면서도 설렌다. 항상 끝을 향해 달려가지만, 막상 그 끝에 다다랐을 때 느끼는 오묘한 그 감정들. ‘시원 섭섭’이란 표현으로는 무언가 부족한 그 감정들. 우린 끝을 바라면서도, 끝을 바라지 않는다. 양가성이란 어려운 단어를, 굳이 사전을 찾아가며 적은 까닭이다.     


요새 즐겨 보는 드라마가 있다. tvn에서 하는 <도깨비>다. 공유가 연기하는 김신 캐릭터 역시 끝을 원하지만, 끝을 원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모두의 숙명일지도. 도깨비조차 그러한데, 인간이라고 별 수 있겠나. <도깨비>의 끝을 빨리 보고 싶지만, 이 드라마가 영원했음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끝의 양가성이다.   

  

모든 끝들이 다 그런 거 같다. 마지막 키워드인 ‘끝’을 작성하는 이 순간 역시 끝의 양가성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뒤숭숭? 멜랑꼴리? 뭐 그런 류의 표현들이 한가득 담겨 있는 감정들에 사무친다. 그것들 중 의도치 않게 고개를 내미는 감정이 하나 있다. 바로 ‘용기’다. 양가적인 것들이 서로 부딪혀 스파크가 튀어 올라 의도치 않은 용기가 만들어지곤 한다. 끝이라고 생각하니 무서울 게 없어진 거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는 표현이 여기서 나온 게 아닐는지.     


우린 천 년, 만 년 살 거 같아 이토록 조심스러운 거 같다. 누군가가 연애 못하는 이유를, 늘어난 수명에서 찾았다. 당신이 천 년, 만 년 살 거 같다는 착각에 빠져 용기내지 못하고 있는 거라고. 평균 수명이 삼십이 되지 않던 시절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직진이었다고. 지금 아니면 사랑할 수 없으니. 끝이니까. 곰곰이 생각하니 맞는 말인 거 같다. 다음이 있겠지, 다음이 있겠지 싶은 마음에 용기내지 못한다. 결국 끝에 다다랐을 때, 그 끝이 주는 양가적인 감정들 사이에서 희미한 용기가 솟아난다.  

  

바라지만 바라지 않는 그 요상한 감정들 사이에서 별안간 튀어 오르는 용기. 끝의 양가성이 주는 그 용기. 막다른 골목에 와서야 내비치는 용기라니, 찌질하다. 그럼에도 그 용기를 응원해주길. 끝에서 피어난 그 용기가, 피어나기 전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이 용기에게도 양가적인 감정을 느껴주길. 찌질하지만, 대단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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