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벤치에 대한 단상
벤치는 풍경 속에 자리한다. 벤치에 앉은 눈은 세상을 관망하고, 그 세상은 곧 풍경이 된다. 풍경이 된 세상은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관망하는 시선의 특권이다. 관망은 관찰자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관찰자는 세상과 한발자국 떨어진 존재다. 세상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 벤치는 그렇게 세상과 거리두기를 통해, 내가 위치한 공간을 풍경이 되게 한다. 세상은 멀리서보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벤치에 앉아 관망하는 풍경은 비극이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안고 있다. 이는 각박한 현대 도심 속 삶의 한자락 생기를 일으킨다.
벤치는 여유 속에 머무른다. 여유는 세상과 한발자국 떨어졌을 때 온다. 벤치는 이를 가능하게 한다. 벤치에 앉는다는 건 세상을 관망할 준비가 됐다는 것이고, 관망한다는 건 그저 바라본다는 것이며, 그저 바라본다는 건 복잡한 고민들을 제쳐놓고 풍경을 감상한다는 이야기다. 숨 쉴 틈 없이 바삐 움직이는 도심 속 삶의 유일한 휴식처가 바로 벤치다. 그런 의미로, 19세기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가 바랐던 산보자의 이상은 벤치에서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바로, 현대 도시의 관찰자이자 탐색자로서의 산보자 말이다.
벤치는 도전 속에 살고 있다. 이제 벤치는 풍경 속에 자리하지도, 여유 속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벤치는 도시 속 휘황찬란한 스펙터클의 피로를 더 이상 감내하지 못한다. 모바일의 등장이다. 벤치에 앉은 눈은 더 이상 관망하는 시선이 되지 못한다. 네모난 사각 틀 안에 갇힌 포로일 뿐이다. 이는 세상과 거리두기를 방해한다. SNS가 제시하는 새로운 모바일 스펙터클은 보들레르의 산보자를 사라지게 했다. 벤야민이 말한, 소비주의와 소외의 기표로서의 디지털 산보자만이 남았다. 벤치는 해체됐고, 풍경은 소멸했다.
그럼에도, 벤치는 도시 속에 존재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 지나치는 곳이 벤치다. 자연광과 자연풍을 맞으며 세상을 관망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그대로 있다. 굳이 여행을 가지 않아도 세상을 풍경으로 만들어주는 곳, 굳이 집을 가지 않아도 휴식을 제공하는 곳이 바로 옆에 있다. 다만, 우리가 그 공간의 의미를 무색하게 하고 있다. 무엇이 그토록 아쉬워 관망하는 시선을 포기하고 있는가. 벤치에 앉은 순간만큼은 네모난 철장을 깰 용기가 필요하다. 이는 각박한 현대 도심 속 삶을 환기시킬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