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문틈에 대한 일상
어린 시절 가장 강렬했던 기억 중 하나는 가장 야릇했던 경험과 같다. 프로이트의 리비도 이론이 수많은 비판을 받으면서도,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까닭이기도 할 테다. 어렸을 적, 정확한 시기는 생각나지 않는데 아마 초등학교 저학년이지 않을까 싶다. 그때 사촌 형네를 갔다. 당시에 형은 스무 살이 훨씬 넘은 나이였다. 그날 난, 어린 시절 가장 강렬했던 기억 중 하나를 얻게 된다.
형이 여자친구를 데려왔다. 부모님께 인사시키는 자리였나 보다. 그 어린 나이에 그 자리에 관심이나 있었겠는가. 당시 유행했던 케이캅스 장난감 로봇 가지고 놀기 바빴지. 천방지축 뛰어다니며 놀다가, 형 방을 지나치게 됐다. 문이 아주 약간 열려 있었다. 그 문틈 사이로 사촌 형과 형의 여자친구가 보였다. 순간 이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이상함이 야릇함이었던 듯싶다. 그 약간 열려 있는 문틈 사이로 보이는 그들의 모습이 정말이지 야릇했다.
<문틈에 대한 단상>에서 문틈이란 공간이 얼마나 이상야릇한지 구구절절 적은 건, 그때 느꼈던 감정을 나름대로 분석한 것인 거 같다. ‘같다’라는 말을 쓰는 것은, 그 글을 쓸 때는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기억을 전혀 생각지 않고 썼기 때문이다. 무의식의 발현으로, 이때의 기억이 영향을 미쳤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같다’라는 표현을 쓴다. 하긴, 문틈을 에로틱하다고 느끼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않나. 이때의 기억이 틀림없이 영향을 미쳤음이다.
문틈으로 빼꼼이 훔쳐보던 당시의 그 장면은 강렬히 야릇했다. 문틈이 주는 그 관음의 시선 때문이었을까? 페미니즘 영화 이론가 로라 멀비가 시각적 쾌락이 관음에서 온다고 주창한 것을 이미 체감하고 있었나보다. 그렇게 보고 있는데, 형과 눈이 마주쳤다. 형이 웃더니 나를 불렀다. 삐죽삐죽 걸어갔다. 틈 사이가 벌어졌다. 조그마한 아이가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나도 그 문틈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때부턴 더 이상 야릇하지 않더라. 썬가드 로봇이나 사달라고 졸라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