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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인 Feb 21. 2023

무얼 해도 딱 좋은 파리를 당신께

로라 키엔츨러, 『낮잠 자기 딱 좋은 곳, 파리』, 후즈갓마이테일


파리에서의 다섯 밤 여섯 날을 떠올려본다. 다녀온 지 십 년도 더 된 그곳의 기억들. 샤를 드골 공항에 내릴 때부터 비 오고 흐렸던 날씨는 샤를 드골 공항을 다시 찾은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짓궂게 맑아졌더랬다. 어두컴컴한 습기를 만끽한 파리 여행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오래도록 기대하고 상상해 왔던 곳에 직접 와봤다는 것만으로도 충만한 기쁨을 느꼈기에. 오랜 기대와 다른 모습도 마주하고, 상상하지 못 한 일도 일어나곤 했지만, 이 도시의 축축한 숨을 내 안에 달갑게 채워 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마음이었기에. 흑백모드로 촬영했냐는 말을 들을 만큼 명도와 채도 모두 낮은 내 파리 여행 사진들은 그럼에도 행복했던 그때의 짧은 추억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파리에 대한 아쉽고 그리운 마음 조각 하나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건 조금 어려웠던지라, 가끔씩 파리를 담은 영상이나 글 속으로 여행을 떠나곤 했다.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와 미국 드라마 ⟪Sex and the City⟫ 시즌 6의 마지막 두 에피소드는 살면서 몇 번을 봤는지 셀 수 없을 정도. 파리를 배경으로 한 여러 그림책은 내가 있는 이곳에서 쉽고 빠르게 여덟 시간의 간격을 뛰어넘도록 도와주었다. 이야기의 과정과 결말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든지, 네모난 프레임 안에서 나만의 파리를 마음껏 그리워하고, 재주껏 그려내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내 눈앞에 놓인 이 그림책 『낮잠 자기 딱 좋은 곳, 파리』가  더없이 반가운 이유를 이렇게나 길게 적고 있는 것이다.



에베레스트 산에 살며, 배낭을 절대 내려놓지 않고, 새로운 곳을 여행하는 걸 좋아하지만 쉽게 지치기도 하는 느긋한 예티. 이백 살 생일을 맞은 예티는 단 하루의 파리 여행을 다녀오기로 결심을 내린다. 그런 예티를 위해 파리의 비둘기 마르셀이 파리 여행 가이드로 나선다. 과연 하루동안 파리를 다 돌아본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 마르셀은 빠듯한 일정을 짜고 실행에 옮기려 하지만, 여독이 풀리지 않은 예티는 여행을 하면서도 계속 낮잠 잘 만한 곳은 없는지 마르셀에게 묻고 또 묻는다.


사크레쾨르 성당, 루브르 박물관, 스트라빈스키 분수,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서점, 그리고 에펠탑까지・・・ 파리 시내 열세 곳의 명소를 두루두루 다니는 동안, 예티의 마음과 마르셸의 마음 모두에 내 마음을 포개보았다. 발길 닿는 곳마다 저마다의 색과 빛을 발하는 도시 어딘가에서 피곤한 몸을 뉘어 아름다운 꿈을 꾸고픈 예티.  갈 곳도 볼 것도 많은 파리를 하루 안에 다 둘러봐야 하는 바쁜 일정 탓에 예티 몫까지 마음이 바쁜 마르셀. 누구의 마음에도 공감되는 이 그림책은 파리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이들 모두에게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파리의 어디를 가든 당신만의 아름다운 낮잠을 청하며 잠시 쉬었다 가세요. 파리의 어디를 가든 당신의 피로 따위 잊게 만드는 각양각색의 아름다움을 넘치게 경험하고 가세요.



젖은 벤치에 앉아 굳어버린 바게트를 잘근잘근 씹어 먹으며 ‘언젠가 다시 온다면 그땐 내게 부디 맑고 밝은 모습을 보여주렴’하고 에펠탑에게 말을 건넸던 이십 대의 나에게 파리의 아름다운 무지개를 선물해 준 그림책. 포토 콜라주 기법을 사용해 실제 사진을 일러스트에 자연스레 녹여낸 작가의 파리를 향한 ‘애정’이 파리를 그리워하고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선명한 아름다움으로 스며들 그림책. 한동안은 이 『낮잠 자기 딱 좋은 곳, 파리』 로 파리에 대한 아쉽고 그리운 마음 조각들을 달랠 것만 같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이야기 하나. 눈길 닿는 곳마다 아름답고 손길 닿는 곳마다 유쾌한 이 그림책에는 파리의 도시를 활보하는 비둘기들이 파리 전문가로서 여행 가이드로 활약한다는 설정이 담겨있다. 이야기는 여행을 함께 하고 인연을 이어가는 주인공들의 ‘의인화된 서사’로만 남지 않는다. 그 안에는 비둘기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과 사고의 방향을 돌리는 ‘전환’의 가능성이 담겨있다.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레 다른 이야기로까지 생각의 가지가 뻗어나가도록, 그리하여 펼쳐보는 이로 하여금 보다 넓은 사유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그림책은 언제나 고마울 수밖에 없다.



* 로라 키엔츨러, 『낮잠 자기 딱 좋은 곳, 파리』, 박재연 옮김, 후즈갓마이테일,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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