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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인 Mar 07. 2023

내 여름을 뒤흔든 유년의 '고유명사'를 소환하다

티모테 드 퐁벨 글,이렌 보나시나 그림,⟪그 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


“방학이었다.”


소년은 여름방학마다 기차를 타고서 안젤로 삼촌이 있는 시골 마을로 길고 긴 여행을 떠난다. 소년은 그곳에서 자신의 여름을 충만하게 즐긴다. 안장에 엉덩이가 닿지 않았던 빨간 자전거가 어느새 자신의 키에 맞게 됨에 기뻐하면서. 그 자전거를 타고 온 마을과 긴 여름을 나선형으로 천천히 누비고 다니면서. 어디에 무엇이 존재하며 언제 열매의 시기가 오는지를 정확히 아는 소년의 여름은 ‘충분했다’. 모자람 없이 넉넉했다. 그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밀밭의 수확으로 인해 늘 다니던 교차로를 지나갈 수 없게 되자, 소년의 길은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꺾이고 휘어지게 되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길 위에서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던 풍경들을 마주하게 된 소년의 길 잃은 자전거가 다다른 곳. 그곳은 드넓은 바다였다. 벅찬 감동 속으로 기꺼이 몸을 던져 잠겨 있을 그때. 소년의 등 뒤에서 또 다른 파도가 강하게 밀려왔다. 해변에 서서 소년을 바라보는 한 소녀. ‘에스더 앤더슨’이었다.



상상한 적 없던 곳에서 상상한 적 없던 이를 만난 그날. 소년을 덮친 우연은 소년을 감싸는 필연이 되어 소년의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다. 쉼 없이 떨리는 몸. 쉬이 진정되지 않는 감정. 바다와 에스더 앤더슨을 만났다는 기억 말고는 여전히 모든 것이 그대로인 여름이지만, 그 짧은 순간으로 인해 “영원히 달라진” 여름을 맞게 된 소년. 그리하여 “영원히 달라진” 나날을 살게 된 소년은 기꺼이 결심하고, 행동한다. 여름의 구심점이 ‘영원히’ 옮겨갔음을 소년은 알아버렸기에.


“어떻게 해야 길을 잃을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소년과 에스더 앤더슨이 언제 다시 만나고, 어디를 향해 함께 걷게 되고,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등 이후의 내용 전개는 이 그림책을 직접 펼쳐 읽을 당신의 기쁨으로 남겨두고 싶다. 다만, 이미 완전했고 충분했고 행복했던 소년의 여름을 한 순간에 흔들어버린 ‘에스더 앤더슨’에 대한 나의 얄팍한 이해를 남겨두자면…


예상하지 못했던 관계와 인연, 그리고 그 안에서 생겨난 비밀은 지금껏 걸어온 ‘익숙한 길’을 잃게 만든다. 동시에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길’로 나를 이어주기도 한다. 원인과 결과 모두로 소년의 삶에 깊게 새겨진 에스더 앤더슨. 잃어버렸기에 이어질 수 있게 된 ‘길’의 시작이 되어준 에스더 앤더슨. 사람마다 다르게 기억되고 삶마다 다르게 자리 잡았을 유년 시절의 고유명사들은 ‘에스더 앤더슨’이라는 이름 하에 선명하게 소환된다.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여전한 그때의 모습으로.

(나의 ‘에스더 앤더슨’이 누구였는지는 밝힐 수 있음에도 밝히지 않으려 한다. 그 이유는 이 그림책의 마지막 장을 보면 알게 될 것…)


‘꽉 채워진 여백의 분명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말하고 보여주는 군더더기 없는 글과 그림. 담백하고도 짜릿하게 유년의 기억을 회상할 수 있도록 이끄는 선명한 문장과 필선. 편안하고도 강렬하게 여름의 풍경 속에 스며들 수 있도록 돕는 맑고 밝은 수채화. 그리고 ‘그 해 여름’을 깊고 넓게 만나도록 활짝 펼쳐진 가로 판형까지. 이 모두가 어우러져 ‘충분한’ 감동을 자아내는 그림책, ⟪그 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주변까지 환해지는 듯한 서사와 물성이 마치 선물같다. 지나간 여름과 지나갈 여름 모두를 눈부시게 물들이는.




 ⟪우리의 길⟫ 그림책으로 알게 된 이렌 보나시나 작가님이 이 작품의 '그림 작가'인걸 알고서 잠시동안 어리둥절한 즐거움을 느꼈더랬다. 같은 작가여도 작품마다 전혀 다른 그림체를 선보일 때 느끼는 색다른 감각은, 그림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



오직 나만 아는 ‘비밀’의 기억은 나를 얼마나 자라게 하는가. 누군가에게 전시하고 어딘가에 드러내는 이야기가 아닌, 내 안에 내밀하게 간직한 이야기는 나를 어디까지 나아가게 하는가. 나를 성장하게 했던 나의 비밀을 회상하고 고민하고 확인할 수 있도록 귀한 이야기를 나누어 주신 최혜진 작가님(이자 번역가님)! ‘이 작품만큼은 다른 분에게 (번역) 작업을 넘기고 싶지 않았다’는 작가님의 진심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그 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 과 작가님의 북토크 영상. 안 본 사람 없었으면 좋겠다는 진득한 팬심을 살포시 적어본다 :)


(북토크 영상은 길벗어린이 @gilbutkid_book 인스타그램 계정에 가면 보실 수 있어요.)


* 티모테 드 퐁벨 글, 이렌 보나시나 그림, ⟪그 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 최혜진 옮김, 길벗어린이,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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