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찬 시, 서수연 그림, ⟪백 살이 되면⟫
시만 먼저 따로 읽는다.
‘-면 좋겠다’라고 반복해서 되뇌는 화자의 바람이 내 마음속으로 먹먹하게 불어 들어온다. 감은 눈으로 보내고픈 ‘백 년’. 그 아득한 시간은 매일 아침 눈을 떠야만 하는 피로한 일상 속에서 꿀 수 없고 깰 수 없는 공상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화자는 가능하지 않은 가만한 소원들을 계속해서 나지막이 읊조린다. 처연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시와 나의 시공을 둘러싼다.
그림과 함께 시를 읽는다.
그림 한 장 한 장에 오래도록 머물며, 화자의 바람을 다시 듣고 만난다. 바람의 온도와 채도가 조금씩 달라져간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나를 감싸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내게서 뻗고 내게로 뻗어오는 빛과 뿌리를 찾아간다. ‘-면 좋겠다’라고 반복해서 되뇌는 바람 속에서 내게로 날아오고 내게서 날아가는 새와 색을 발견한다. 나는 나로 돌아온다. 나는 나로 변해간다. 나는 나로 살아간다.
가만한 소원의 절대적 불가능성을 말하는 듯해 그저 아득하기만 했던 ‘백 년’의 시간을 상대적 가능성으로 담담히 구현한 그림. 시와 그림이 만나자 비로소 따스하게 불어오고 선명하게 이루어진 바람 사이로, 나의 바람을 더해본다. 나를 발견하고 발화하기 위해 잠들고 쉬어갈 ‘백 년’의 시간이 다양한 길이와 형태로서 내 피로한 일상을 채우고 지켜주기를. 조금씩 짙고 깊게 아름다워져 갈 나의 숲에서 언제든 편히 내 눈을 감고 뜰 수 있기를. 나로서 나만의 휴식을 취할 수 있기를.
내 숲이 여전히 ‘부드러운 오후의 빛’ 속에 있을 수 있도록 나를 둘러싼 이들의 다정을 기억하고 싶다. 기억해야 한다. 나의 오랜 잠을 충분히 기다려주는 이들이 있기에, 나의 멋쩍은 두 손을 살갑게 맞잡아주는 이들이 있기에, 나는 언제든 불안전한 현실로 안전하게 회귀할 수 있다.
잠에서 깨어나도 여전히 환한 ‘한낮’의 현실이 그저 슬픔과 고통이지 않도록 기꺼이 나의 ‘판타지’가 되어주는 나의 가족, 나의 친구. 당신이 묻는 따스한 안부와 당신이 내어주는 다정한 환대 덕분에 나는 나로 잠들고, 쉬어가고, 깨어날 수 있다.
(에바 린드스트룀의 ⟪돌아와, 라일라⟫에는 먼 길을 떠난 라일라가 홀로인 긴 시간을 무사히 보내고 돌아오길 기다리는 이들이 있다. 이들과 라일라가 다시 만날 그 어느 순간을 그려본다면, ⟪백 살이 되면⟫에 담긴 초록빛 환대의 장면과 같지 않을까. 라일라가 라일라 자신이 되어 돌아올 그 모든 과정을 존중하는 다정한 마음들로 아름답게 채색된.)
시에서 그림으로, 그림에서 시로 자유롭게 마음의 걸음을 옮긴다. 서로가 서로를 아름답게 변주하는 펜과 붓의 말을 보고 듣는다.
거칠기도 부드럽기도 한 현실의 질감을 그려내고 드러낸듯한 그림 안에서, 시구詩句는 일상과 공상을 함께 긍정한다. 반복해 소원하는 시구 곁에서, 그림은 일상과 공상을 함께 구현한다. 시는 시로서, 그림은 그림으로서 자신을 세우고 서로를 채운다.
고요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우리의 시공을 둘러싼다.
책을 덮는다.
선명한 오렌지빛 점이 된 바람과 함께, 나도 환하게 웃는다.
우리는 마주 보며 웃는다.
* 황인찬 시, 서수연 그림, ⟪백 살이 되면⟫, 사계절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