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아픔을 돌아보고, 어른이 된 나를 안아주는 두 권의 그래픽노블
그 밤이 오기 전까지, 책을 읽고서 소리 없이 눈물 흘린 적은 많았어도 꺽꺽대며 오열한 적은 없었다.
아이를 재우고 난 뒤 읽어 내려간 책을 붙잡고서 펑펑 울었던 밤. 출장 간 반려인에게 전화를 걸어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뜨거운 눈물로 토로했던 밤. 되돌릴 수 없는 날들을 수없이 되새김질하며 스스로를 갉아먹었던 과거의 나를 억센 울음으로 토해냈던 밤. 그 밤, 말없이 나를 알아주고 안아준 책은 바로 이수연 작가님의 그래픽노블, ⟪내 어깨 위 두 친구⟫ 였다.
유년의 트라우마로 인해 오래도록 자신을 숨기며 살아왔던 토끼.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할뿐더러 타인의 다정과 진심도 의심하며 자랄 수밖에 없었던 토끼. 그의 어깨 위에는 언제나 검은 친구, ‘표범’이 자리 잡고 있다. 트라우마로 인해 생겨난 내면의 목소리가 형상화된 존재, 표범. “세상에 기대하지 않도록, 사람을 신뢰하지 않도록” 토끼에게 쉼 없이 말을 거는 표범은 토끼를 바깥세상으로부터 지켜주려는 유일한 친구이자, 토끼를 토끼 자신 안에만 가둬 두려는 악몽이었다.
이야기는 자신과 자신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되는 토끼의 ‘자기 긍정’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스무 해 넘도록 자신의 꿈조차 마음대로 꾸지 못했던 토끼가 어떠한 계기로 자신의 아픔을 용기 내어 마주할 수 있게 되었는지. 자신의 감정과 인생을 용기 내어 고백할 수 있게 된 토끼의 곁에 누가 어떻게 함께 했는지. 한 장면 한 장면이 모두 나의 상처와 아픔, 변화를 비추고 있었고, 나와 반려인과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내 모든 상처 난 조각을 돌아보고 돌보려 애썼던 나의 이야기였고, 불완전한 스스로를 향한 믿음과 사랑을 함께 회복해 온 우리의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지난 3월에 출간된 이수연 작가님의 신작, ⟪나를 감싸는 향기⟫를 펼치는데 마음의 준비가 꽤나 필요했다. 이 책을 언제 어디서 펼치든 전작처럼 눈물을 한 바가지 쏟아낼 거라는 예감이 들었기에. 책을 받아 들고 며칠이 지난 후, 뒷표지에 적힌 “내가 살던 그 집이 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었던 거야” 라는 문장에 이끌려 용기 내 첫 장을 펼쳐보았다.
엄마와 아빠 그 누구에게도 충분한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내온 홍당무. 홍당무의 유년은 ‘악취’로 가득했다. 버림받거나 관리받지 못한 것들의 썩은 냄새로 가득 찬 유년의 공간. 끌어안고 어루만지는 말들의 부재로 인한 상처가 마음속에 켜켜이 쌓여온 유년의 시간. 홍당무는 그 안에서 자신을 살게 하는 향기를 찾아낸 사람이었다. 자신을 살게 하는 사랑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나를 감쌌던 악취’가 자신의 전부가 아님을 알았고 그대로 살아낸 홍당무는, ‘나를 감싸는 향기’를 스스로 찾고 바꾸어 나가는 사람으로 성장해갔다. 어른이 된 지금도 어떠한 향기를 맡으면 숨 막혔던 유년의 시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에 괴로워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숨 쉬게’ 하는 향기를 찾아내고 찾아가기를 포기하지 않는 홍당무. 그녀는 자신의 아픔이 무엇인지, 자신이 어디에 있고 싶은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아는 이만의 향기를 만들어가며 스스로를 치유해갔다.
개인적으로는 이 두 권의 그래픽노블을 함께 보기를 권하고 싶다. 서로 다른 두 주인공의 이야기지만, 과거의 트라우마에 끌려가는 현재를 살지 않기 위한 <자기 인지-자기 이해-자기 표현-자기 관리>의 과정을 전체적으로 연결해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들여다볼’ 용기를 내었던 ⟪내 어깨 위 두 친구⟫의 토끼. ‘내가 원하는 나로 살아갈’ 용기를 낸 ⟪나를 감싸는 향기⟫의 홍당무. 버림받고 상처받은 자신을 자신의 전부로 두지 않기 위해 붙잡을 용기와 놓아버릴 용기, 인정할 용기와 떠나보낼 용기 모두를 낸 토끼와 홍당무. 두 사람의 이야기는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고 자신의 감정을 돌보며 자신을 알아가고 자신으로 살아가는 이의 회복과 성장 과정을 담담히 담아내고 있다.
집 안 어디에서도 편히 쉴 수 없었던 이들. 슬픔과 외로움이 짙게 배인 “무거운 회색냄새”를 너무도 잘 아는 이들. 돌봄과 안전, 애정과 믿음의 결핍 속에 유년을 지나온 이들. 저마다의 오래된 표범과 함께 오늘을 버텨내는 이들. 아팠고 아픈 이들 모두에게 두 권의 책, 두 명의 주인공이 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상상해 본다. 과거의 아픔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고 현재의 아픔 또한 끊임없이 생겨나지만, 모든 순간이 향기로울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나를 위로하고 나를 알아주고 나를 감싸 안아주는 ‘나만의 향기’를 찾아내자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위로”가 되어줄 자기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는 ‘힘’을 우리 함께 찾아가자고.
우리 함께, 사랑하자고.
우리 함께, 살아가자고.
상처와 함께 살아가도록, 상처 위에서 삶을 뻗어가도록 상처 안에서 서로를 응원하는 두 이야기는 내 안에 이렇게 스며들었다. 쉼 없이 흘러내리는 내 뜨거운 눈물과 함께. 코 끝에 어떤 향이 맴돈다. “습하고 깊은 슬픔의 냄새(⟪내 어깨 위 두 친구⟫, p.20)”가 아닌, “따스하면서도 매콤한, 물 냄새와 흙 냄새가 어우러진(⟪나를 감싸는 향기⟫, p.99)” 이끼의 향이. 가만하지만 분명한, 이끼의 이끼다운 향이.
"현실의 세계에서 살 것인가. 기억의 세계에서 살 것인가. 결정하는 건 바로 나다."
- ⟪내 어깨 위 두 친구⟫, p.154
"우리는 상처의 흔적을 존중받아야 한다는 말을 나누었다. 그 일들을 감내해 낸 서로의 강인함에 대해서 외면하지 않고, 진심 어린 응원을 보냈다."
- ⟪나를 감싸는 향기⟫, p.113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발견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발화할 수 있도록 나의 곁을 지켜주는 나의 수달 씨. 내 안의 어두운 친구가 세워둔 벽을 넘어와 나를 꼭 끌어안아준 나의 수달 씨. 나의 상처와 결핍이 나의 잘못이 아님을 분명한 확신으로 확인시켜 준 나의 수달 씨. 나만의 향기를 나의 힘으로 찾아갈 수 있도록 응원해 주는 나의 수달 씨.
당신 덕분에, 당신과 함께 지나온 시간 덕분에 나는 나를 찾아갈 수 있었어. 나를 안아줄 수 있었어. 결혼식 날에는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해 준 당신”이라 말했지만, 이제는 “당신보다 내가 나를 더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여전히 눈물 흘리는 밤이 많지만, 그때마다 변함없이 나의 마음과 나의 선택을 감싸 안고 붙잡아주는 당신의 두 손에 감사해.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도록 안전과 신뢰의 울타리를 함께 다져가는 우리의 시간, 우리의 공간, 우리의 관계에 감사해.
“아마도 수달 씨와 함께하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수달 씨에게 안겨 울 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내 어깨 위 두 친구⟫,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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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연, ⟪내 어깨 위 두 친구⟫, 여섯번째봄, 2022
- 이수연, ⟪나를 감싸는 향기⟫, 여섯번째봄,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