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인 May 03. 2023

그리워할 할머니가 내게 없다 해도

조던 스콧 글, 시드니 스미스 그림, ⟪할머니의 뜰에서⟫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지병을 앓고 계셨던 ‘엄마의 엄마’. 내가 지금의 내 아이 나이였을 때 숨을 거둔 할머니. (당시 기준) 열네 명의 손주들 중 하나인 내 이름을 알고는 눈을 감으셨을지. 단 둘이 제대로 대화 나눠본 기억 하나 없는 나는, 그저 침상에 누워만 계셨던 무기력한 모습이 할머니에 관한 내 추억의 전부인 나는, 그녀를 그리워할 수 없다. 그리워할, 그리워하고 싶은 무엇도 우리 사이에 없었기 때문에.


이십 년 가까이 한 집에서 함께 살았던 나의 또 다른 할머니, ‘아빠의 엄마’. 긴 시간을 함께 부대끼며 살았건만, 나는 그녀로부터 ‘할머니다운’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다. 사는 내내 그녀가 나와 나의 가족에게 퍼부었던 모든 말은 가시였고, 칼날이었다. 그녀의 말에 쉼 없이 찔리고 베였던 날들. 한시도 쉬지 않고 몸과 입을 놀리는 그녀의 모습이 할머니에 관한 내 감정의 전부인 나는, 그녀를 그리워하고 싶지 않다. 그리워할, 그리워하고 싶은 무엇도 우리 사이에 없었기 때문에.


할머니와 함께 한 그리운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타인의 이야기로부터 애써 고개를 돌려왔던 나였다. 따스한 이미지와 정겨운 서사로 ‘조손 관계’를 다룬 책이나 그림책을 애써 멀리해 왔던 나였다. 할머니로부터 온전한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나의 유년과 할머니로부터 온전한 사랑을 받아본 저들의 유년을 씁쓸히 비교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저마다의 할머니를 회상하는 책을 어쩌다 구입하게 되어 펼쳐 볼 때면, 초라해진 마음을 가눌 길 없어 재빨리 책장을 넘겨댔다. 저자의 이야기에 포갤 수 있는 내 유년의 조각의 ‘부재’를 느끼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표지의 그림과 제목부터 관계과 기억의 온기를 전달하려는 이 그림책 또한 혼자 펼쳐 볼 용기를 오래도록 내지 못했을 테다. 그림책을 사랑하는 다른 이들과 함께 펼쳐보는 계기가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면.



아이는 학교에 가기 전, 학교가 끝나고 난 뒤 바바(폴란드어로 ‘할머니’를 뜻한다고 한다)의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바바와 함께 식사를 하고, 바바와 함께 길 위의 지렁이를 주워 담고, 바바와 함께 텃밭을 가꾸는 아이의 일상에는 그리 많은 말이 오고 가지 않는다. 자신의 손짓과 몸짓과 웃음으로 아이를 향한 사랑과 세상을 향한 다정을 내보이는 바바. 바바의 따스한 눈빛과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아이와 지렁이와 토마토와 오이와 당근과 사과나무는 자라난다. 자신들이 살아가는 뜰에서. 자신들이 살아가야 하는 땅에서.


    책장을 덮자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던 눈물은 내 유년의 부재를 상기하는 그것이 아니었다. 내가 살아가고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서 내가 나로 자라날 수 있도록 최선의 사랑과 다정을 내어주었던 누군가들이 고여있는 눈물이었다. 저마다 다른 이름으로 어린 나와 함께 했던 이들. 저마다 다른 관계로 어린 나를 지켜봤던 이들. 이들의 따스한 눈빛과 부드러운 손길이 내 삶의 어느 조각으로 체화되었음을, 나의 눈물이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이들의 사랑과 다정을 나 또한 언제 어디서든 이어가고 흘러가게 할 수 있음을, 나의 눈물이 분명하게 말해주었다.


    장마다 아이와 바바를 비추고 감싸는 환한 빛. 다양한 크기의 작은 장면들에 섬세하게 담긴 다양한 감정의 변화. 양쪽 페이지를 꽉 채운 장면에 담긴 어느 순간들의 고요한 감동. 장을 넘길수록 점점 더 선명하게 그려지는 바바의 얼굴. 지렁이의 숨을 지키고 구하기 위해 바바가 그러했듯이 빗속으로 힘차게 뛰어나가는 아이의 걸음. 이 모두가 달아나려는 내 걸음을 다정히 붙잡는다. 이 모두가 돌아서려는 내 귀에 나지막이 속삭인다.


내 그리움의 결핍을 적나라하게 비출 것만 같은 타자의 이야기로부터 더는 도망치지 않길 바라.


누군가에게는 책장 속의 할머니가 자신의 할머니를 가리키는 애틋한 '기호'처럼 느껴지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삶에서 사랑을 가르치고 다정을 물려준 이들을 돌아보는 고마운 '기회'가 될 수도 있어.


무엇보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기 위해서 많은 색, 많은 말, 많은 기억이 필요한 것만은 아니야.



누군가를 가만히 떠올리고, 그려내고, 그리워한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더스트재킷을 벗기고 마주한 두 얼굴에게, 나는 말했다. 그리워할, 그리워하고 싶은 누군가가 내게 있다고. 내 안에 담아내고픈, 내 삶으로 닮아가고 싶은 누군가가 내게도 있다고. 나도, 그리워할 수 있다고.


그리하여 이제부턴 당신이 들려주고 보여줄 ‘할머니’의 이야기에 바투 다가갈 용기를 내어보고 싶다. 비록 내게 보고 싶은 할머니가 없다 해도, 당신이 보고 싶어 하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기꺼이 청해 듣고 싶다.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내 마음이라 해도, 당신이 머물렀던 유년의 뜰(Your Baba’s Garden)을 함께 거닐어보고 싶다. 누군가로부터 우리가 받았던 사랑, 그리하여 누군가를 향해 우리가 이어가는 사랑을 말하고 나누고 모으고 싶다.



* 조던 스콧 글, 시드니 스미스 그림, ⟪할머니의 뜰에서⟫, 책읽는곰, 2023

매거진의 이전글 상처와 함께 찾아가는 나다운 향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