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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밍드림 Apr 26. 2024

바르샤바 '칼을 높이 치켜든 인어, 그리고 쇼팽' ②

세계여행 에세이: 폴란드 바르샤바 (2화)


아침 출근길에, 잘 안 하던 짓거리로, 타로 앱에서 오늘의 운세를 점쳐 보았다. 요즈음 회사 생활이 너무 따분하여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바라던 탓에 '오늘 무슨 요행수가 없을까'하여 타로 카드 한 장 뽑아보았더니, 0번 'The Fool'이다.


바라던 요행의 시그널은 아닌 것 같아도 '홀가분한 마음으로 새로운 시작을 위해 길을 떠나는' 것으로 긍정적으로 풀이를 할 수 있어서 괜한 짓해서 기분만 상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림을 보고 있자니, '번잡한 도시를 떠나 힐링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떠나보고 싶다. 역마살(驛馬煞)이 도지나 보다. 




보드카 몇 잔에 취하다


토요일 오전 늦게 바르샤바 봉기 모뉴먼트(Warsaw Uprising Monument) 근처 주차장에 차를 넣어두고 올드타운으로 향한다.


Warsaw Uprising Monument. 예전엔 무엇인지도 모르고 관심 없이 지나쳤다.


올드타운 입성 전에 뉴타운(Nowe Miasto) 골목에 먼저 들어서 본다. 흐린 날인데도 인파로 북적이고, 노변을 따라 늘어선 레스토랑의 테라스에는 벌써 빈자리 하나 없다.


바르샤바 뉴타운의 퀴리부인 생가 박물관 바로 앞 골목길


Zapiecek이라는 식당 앞에서 잠시 기다리다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서는 술 마시기엔 이른 시간임에도 40ml 보드카 각각 다른 맛 넉 잔 세트와 피에로기(Pierogi, 폴란드 만두) 두어 종류를 페어링 해서 먹어본다.


보드카를 얘기하자면, 1982년 국제조정재판소에서 러시아를 원조로 인정해 버렸지만, 정작 폴란드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조라고 생각한다. 나도 러시아의 벨루가 보다 폴란드의 쇼팽이나 벨베데레 보드카를 더 좋아라 한다.


피에로기를 얘기하자면, 양배추와 버섯으로 만두소를 만들기도 하고, 감자, 치즈와 양파로 만들기도 하고, 심지어 딸기, 블랙베리로 만드는 만두도 있다. 이 식당 메뉴판에 올라와 있는 종류를 세어보니 대략 서른 가지나 된다. 유래야 어쨌든 폴란드에 왔으면 꼭 한 번 먹어보아야 할 국민 음식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집에서도 만두 빚어 먹는 나로서는 이국의 만두 생김새와 저마다의 독특한 맛이 그저 기특하다.



보드카 작은 잔 몇 샷 마셨을 뿐인데 알딸딸하게 취기가 오른다. 이른 시간인데도 술이 낭만을 부르고 낭만이 술을 부른다. 홀짝이며 마실 때 그만두어야겠다 싶어 잔을 내려놓고 (남은 게 없다) 그만 자리를 뜬다.



역사 속으로 들어서다


폴란드에는 3C 위인이 계시니, 먼저 천 년 넘게 믿어온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1473~1543), 다음으로 쇼팽(Chopin, 1810~1849), 그리고 어린이 위인전에 꼭 등장하는 퀴리부인(Curie, 1867~1934)이 바로 그분들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분들이 공통적으로 태어나기는 폴란드에서 했지만 이탈리아(코페르니쿠스)나 프랑스(쇼팽, 퀴리부인) 등에서 주로 활동을 하였다.)


보드카에 취한 식당 바로 옆 건물이 마리 퀴리 박물관이지만, 낮술 영향으로 입장은 하지 않기로 한다.


뉴타운 골목을 빠져나와 잠시 걷다 보면 이내 올드타운으로 입성하는 관문인 바르샤바 바비칸(Barbican)을 만난다. 도시나 성(Castle)을 지키기 위해 요새화한 성문이 바비칸인데, 좁은 공간에 거리의 화가, 거리의 악사 등 다채롭고 아기자기한 광경이 꽉 들어차 있다.


뉴타운 (신시가지)에서 올드타운 (구시가지)로 들어서는 관문인 바르샤바 바비칸


그리 길지 않은 골목길을 걷다 보면 이내 올드타운의 랜드마크인 시장 광장에 다다른다.


벨기에 브뤼셀의 그랑플라스 같은 화려함이 아니라 미려(美麗)한 아우라가 피톤치드처럼 뿜어져 나와 살갗에 닿는 듯하다. 건물 하나, 사람 한 명이 각기 오브제이고, 광장은 그런 오브제를 모아 전시한 미술관이다.


그 누가 이곳을 보면서 그 옛날 포탄에 스러져 간 뼈아픈 과거를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위대한 부활이다.


광장 둘레로 레스토랑이며 카페며 꽃집이며 기념품점이며 빼곡히 들어섰고, 그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인어 동상


술도 깰 겸 광장 카페에 또다시 죽치고 앉아서, 풍경 속 하나의 오브제가 되어,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만끽해 본다. 인어의 뒤태를 멍하니 바라보고, 푸드덕 거리며 날아다니는 비둘기들을 하릴없이 바라본다. 다들 그러고 있고, 눈치 주는 사람도 없다. 이곳을 재건하려 피땀 흘린 분들도 이런 풍경에 부모의 심정으로 보람을 느끼시지 않을까.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를 잊는다. 그러다 번잡한 광장을 겨우 빠져나오면, 이번에는 하우스 와인으로 흐려져 가는 취기를 다시 충전해 준다.


올드타운 시장 광장을 살짝 벗어난 곳의 또 다른 Zapiecek 레스토랑에서 바라본 마주한 레스토랑


올드타운 안에 호박(Amber) 보석 판매점들이 꽤나 많다. 발트해에 전 세계 호박의 90% 가까이가 매장되어 있다고 한다. 송진이 수 천만년 동안 화석화되어 호박이 만들어지는데, 이들 지역에서는 바닷속에 잠겨있다가 바닥이 뒤집어질 만큼 해풍이 불면 해안으로 떠밀려 온다라고 하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서너 군데 구경삼아 들어가 보았어도 내 취향이 아니거나 (호박 안에 곤충이 들어있는 것이 훨씬 고가이다) 비싸서 충동 구매할 걱정은 전혀 없으니 참 다행이다.




비스와 강가에 노을이 지다


올드타운을 반대편으로 빠져나오면 왕궁이 위치한 탁 트인 Castle Square에 들어선다. 조금 더 역동적으로 오가는 사람들의 활기를 느끼는 곳이다. 그러면서도, 마치 동화책 속으로 빠져 들어온 느낌이다.


오후가 되면서 날이 개고 하늘은 푸르러져 간다. 딱히 정한 데 없이 여기 기웃 저기 기웃. 그런데도 시간은 빨리도 흐른다. 한나절이 다 지나간다.


좌측 Castle Square (plac Zamkowy, 왕궁 광장).  우측 Castle Square 조망 (출처 : Expedia)


테라스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앉아 멍하니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싶은 로망이 불과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다시 꿈틀대기 시작한다. 이런 게 바로 힐링이 아니겠나.  


Castle Square 레스토랑에서 오후를 즐기는 사람들


걷다 쉬다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인어가 살았다는(산다는) 비스와 강가에 내려서 있다. 노을이 지기 시작한다. 노을이 지는 강변은 한가롭기 그지없다.


바르샤바... 인위적이지 않고 차분한 도시라서 그런지 번잡한데도 힐링이 되고, 아픈 역사를 숨기고 있어서 그런지 대단한 액티비티가 없음에도 지루하지가 않다. 대다수의 다른 여행객들도 그러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비스와 강둑에 걸터앉아 오순도순 담소에 여념이 없는 바르샤바 시민들


이날 저녁 메뉴는 골롱카(Golonka)와 주렉(Zurek). 골롱카는 독일의 슈바인스학세와 닮은 꼴인 돼지족발과 같은 음식이고, 주렉은 호밀가루, 소시지 같은 재료를 넣고 끓인 약간 신맛 나는 수프이다. 피에로기는 처음 먹어 보는 것이었지만, 이 두 음식은 예전에 먹어 본 기억이 나는 추억의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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