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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밍드림 Apr 24. 2024

바르샤바 '칼을 높이 치켜든 인어, 그리고 쇼팽' ①

세계여행 에세이: 폴란드 바르샤바 (1화)

얼마 전 유튜브를 보다 보니, 독일에 사는 한국인 여성 한 분이 자신더러 중국인이라며 희롱하는 독일 여성에게 "너, 폴란드 사람이지?"라고 대꾸하며 속된 말로 '엿 먹이는' 장면이 나왔었다.


"유럽의 모든 민족 중에서 독일이 가장 싫어하는 민족이 폴란드 민족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독일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이자 정치가였던 헬무트 폰 게를라흐 (1866~1935)의 말이다.


이웃한 나라들 사이에는 갈등 차원을 넘어 침략과 저항이라는 증오의 역사를 갖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여러 나라를 다니다 보면, 서로 간에 힘이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차이가 존재할 경우에는 우월의식과 피해의식(상대방이 '잘 나간다 싶으면' 느끼는 시기심 같은 것)이 혼재하기도 함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독일 사람들이 폴란드 사람들을 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개인적인 의견일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엔 폴란드 사람들이 유럽 사람들 중 가장 순박한 것 같다.


'시렌카 바르샤브스카', 칼을 높이 치켜든 인어


옛날 발트해에 인어 자매가 살았다. 어느 날, 언니 인어는 “뭍에 올라가 보면 어떨까? 서로 다른 방향으로 헤엄쳐 세상을 구경하는 거야."라는 제안을 했다.


언니는  덴마크 쪽으로 갔다. 코펜하겐 바닷가의 인어 동상이 바로 언니라고 한다. 동생은 폴란드 쪽으로 갔다. 비스와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모래 강둑이 아름다운 마을에 도착한 후 그곳 강에서 계속 살기로 했다.


어느 날 젊은 어부가 강둑에 누워 노래를 부르는 인어를 보았다. 인어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마을 어르신이 크게 기뻐했다. “복을 받을 조짐일세. 평화롭게 살도록 놔두기로 하세.” 인어는 매일 비스와 강둑에 올라 노래를 불렀고, 마을 사람들 마음에 평온이 깃들었다.


어느 날 외지 상인이 근처를 지나다가 인어를 보았다. 큰돈을 벌려는 욕심에 상인은 몰래 다가가 그물을 던져 인어를 생포하였다. 무방비 상태였던 인어는 도와 달라고 소리쳤다. 젊은 어부가 다급한 외침을 듣고서 달려와 상인을 쫓아버리고 인어를 구해주었다.


“젊은 어부여, 당신의 은혜를 갚기 위해 비스와 강을 떠나지 않을 게요. 당신과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 될 거예요. 마을 주민들에게 전해주세요. 저를 영원히 기억하고 사랑하라고.”


... 세월이 흐르며 마을은 점점 커져서 지금의 바르샤바가 되었다.


고난 속에도 희망을 잃지 않는 노래를 불러 주리라


바르샤바 인어에 대한 전설은 여러 다른 스토리가 전해져 온다. 코펜하겐 인어 이야기는 안데르센(1805~1875년)의 '인어공주' 영향을 받아 훗날에 덧붙여졌다는 견해가 있기도 하지만, 바르샤바 사람들의 믿음은 꽤나 뿌리가 깊다. 마땅히 치세의 왕이나 전쟁 영웅의 동상이 서 있어야 할 자리, 즉 도심 한복판에 인어의 동상을 세웠고, 14세기 때 이미 바르샤바 시(市) 문장(紋章)에 인어를 새겨 넣었다고 한다.

바르샤바 시 문장(Coat of Arms). 택시문에도 있다.



하지만, "지켜주겠다"는 인어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폴란드 민간인 590만 명, 군인 60만 명이 사망했고, 바르샤바 시의 85%가량이 참혹하게 파괴되었다.


그러나, "먼 훗날 바르샤바에 시련이 닥칠 것이니, 비스와 강은 후손들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승리를 복돋우는 노래를 불러 주리라"라고 약속했다는 다른 스토리의 인어 뜻대로 바르샤바 사람들은 정복되었으나 봉기하였고, 전후에는 도시를 예전 모습에 가깝게 재건해 냈다. 마치 절망 속에 희망의 불꽃을 쏘아 올린 것처럼 말이다.



바르샤바가 초행은 아니지만, 지지난해 늦여름에 바르샤바를 작심하고 둘러본 것은 내가 다니는 회사의 일부 현지 직원들에게 문제가 발생하여 조사차 폴란드를 방문하게 된 것이 기회가 된 것이다. 썩 좋지 못한 계기라고나 할까. (게다가 난 이런저런 감성 글 적는 것을 좋아하지 '조서' 따위에는 취미가 없다. 역설적으로 잠시 리프레시가 필요했다고나 할까.)


폴란드 그리고 바르샤바를 여행하는 것은...


오래전 폴란드 땅 중 처음으로 찾았던 곳은 독일 이름 '아우슈비츠', 폴스카(폴란드) 이름으로 '오시비엥침'이라고 부르는 곳에 자리한 독일 나치 강제 수용소이자 집단 학살 수용소(1940~1945)였다.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던 날로 기억한다. 가이드를 따라 두어 시간 둘러보다 가스실을 마지막으로 가족 모두 중도 포기할 만큼 음울한 곳이었다. 보통의 여행 목적과는 크게 달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의 침략을 가장 먼저 받은 나라가 폴란드이다. 5년이 넘는 독일 강점기 동안 홀로코스트(유대인 탄압과 학살)로 인해 폴란드계 유대인 200만 명 이상이 학살당했고, 앞서 말한 것처럼 폴란드 인구의 5분의 1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도시들은 파괴되었다. 폴란드든 바르샤바든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생경하고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한 것은, 유럽의 북동쪽에 치우친 지리적인 탓도 있겠고, 무엇보다 유럽의 다른 곳보다 전쟁의 상흔이 훨씬 더 큰 탓이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고정관념과는 다르게, 바르샤바는 2023년 유럽에서 가장 여행하고픈 도시(European Best Destinations) 서베이 1위를 차지했다. 친절하지, 안전하지, 먹을 것과 쇼핑할 것 저렴하지, 쇼팽 있지, 여러 면모로 매력적이라 해서, 그리스 아테네(2위), 슬로베니아 마리보르(3위), 오스트리아 비엔나(4위)에 크게 앞섰다. 우리에게도 바르샤바의 재발견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바르샤바를 다녀보도록 하자.

 

견줄 데 없는 프라이드, 바르샤바 올드타운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 8월 1일, 소련의 붉은 군대가 독일군을 밀어내며 바르샤바 동부 외곽까지 진군하는 기회를 틈타 시민군 등이 바르샤바 독립항쟁을 일으켰다. 바로 바르샤바 봉기(Warsaw Uprising)이다. 그런데, 소련군이 바르샤바 바로 앞에서 돌연 진격을 멈추어 버렸고, 독일군은 전열을 재정비한 후 1만 6천여 명을 죽이고 끝내 봉기를 진압했는데, 그때 바르샤바는 63일 동안 외부로부터 고립된 채 독일군의 잔혹한 진압 아래 철저히 파괴되었다고 한다. 비록 실패한 봉기였으나, 지금까지도 폴란드인의 이에 대한 자긍심은 대단하다.


시민군 (photograph taken on the corner of Marszałkowska and Sienkiewicza streets) (출처: culture.pl)


바르샤바가 파괴될 때 13세기 후반부터 유구한 역사를 이어온 올드타운(구시가)도 따라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45년) 촬영된 바르샤바 올드타운의 중심지(시장 광장) (출처 : Wikipedia)


종전 후 바르샤바 시민들의 의지로 1945~1966년에 걸쳐 인류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규모로 시장, 주택, 도시 성벽, 왕궁, 교회 등 올드타운이 형성된 13세기부터 20세기까지 한 도시의 역사를 아우르는 종합적 재건을 이루어 냈고, 올드타운은 원래와 똑같은 상태로 재건되었다. 1980년 바르샤바 역사지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바로 그런 이유로 등재되었다.


재건 후 현재의 바르샤바 올드타운 모습 (Free Image)


"(한때나마) 폴란드인들의 자유에 대한 열정, 정의감, 강자에게 굴하지 않는 용기가 높이 찬양되었다. 이러한 이미지는 ‘품위 있는 폴란드인’이나 ‘아름다운 폴란드 여인’이라는 고정관념으로 나타났다." ('이웃 나라의 이미지: 독일의 폴란드 인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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