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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밍드림 May 28. 2024

애수에 젖은 모스크바, 그리고 수은 가로등 ②

세계여행 에세이: 러시아 모스크바 (최종화)

겨울이 오면 봄은 멀지 않으리


낭만파 시인 퍼시 쉘리의 'Ode to the West Wind'(서풍에 부치는 노래) 마지막 시구(詩句) "If Winter comes, can Spring be far behind?" 이만큼 러시안 감성의 본질에 가까운 표현이 또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꽃 피는 봄은 기어코 오고 말 터이니, 때로는 아프다 못해 표정마저 잃어버리는 어두움도, 때로는 슬프다 못해 눈물조차 흐르지 못하는 적적함도, 모두 다 "믿으라, 단지 지나가는 것일 뿐이다." 경쾌한 듯 서글픈 듯.



모스크바의 상징을 찾아서


뼈를 두들겨 패는 한기와 밤새 전투를 벌이느라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런 몸을 이끌고, 일요일 아침, 모스크바 강 쪽으로 걷기 시작하였다. 설렘 못지않은 긴장감으로 쭈뼛쭈뼛 걸었다.


뉘인가 동상 아래 서너 명의 소녀가 모여 있었다. 갖가지 꽃들이 다발로 놓여 있었다. 푸쉬킨이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푸쉬킨의 이 시는 요즘의 내 처지를 위로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런들 무엇하랴, 푸쉬킨의 삶은 끝내 그를 속였다. 대문호는 어이없게 죽었다.


'가나다라' 처음 배우는 것처럼 거리의 러시아어 키릴문자 간판들을 열심히 읽다 보니 (정확히 읽어내면 기분이 좋아졌다.) 볼쇼이 극장에 다다랐다.


차이코프스키 '백조의 호수' 2막 10번 '정경'(Scene)이 이어팟으로 재생되었다. 뜻밖에도, 런던 웨스트엔드 뮤지컬 '빌리 엘리엇'을 떠올렸다. 발레리노 꿈을 이루듯 소년이 하늘로 솟구치던 순간과 격정의 선율이 극장 앞에서 되살아났다. 카메라는 나를 가운데 두고 아크(Arc) 레일을 따라 완전한 원을 그리며 천천히 움직였다.


'바스크레센스키 문'(부활의 문)이 나타났다. (1931년 장갑차가 다닐 수 있도록 문을 부숴버렸다. 1995년 복원되었다. 이념의 퍼레이드는 역사보다 고귀했다.) 저 문만 지나면 붉은광장이 펼쳐질 터였다.



러시안 감성의 상징들


부활의 문은 이름처럼 부활했고, 반대편 벽면엔 그리스도 부활의 이콘이 붙어 있었다.  


바스크레센스키 문과 그리스도의 부활


문을 지나기에 앞서, 모스크바의 중심이자 원점(0 km)을 나타내는 동판 표지(Kilometer Zero) 위에 서서 왼쪽 어깨너머로 동전을 던져보았다. 경계선 안으로 떨어져야 했는데... 대기하던 집시만 좋을 의식이었다.


그다음은 국립역사박물관과 카잔 성당이었다. 순서를 미리 정하진 않았어도 권위적 통치자가 치밀하게 정해놓은 순서대로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카잔 성당은 바실리 성당과 짝이었다. 소련 시대의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1993년에 다시 세워졌다. 바실리 성당도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철거될 뻔했단다. 권위 앞에 역사는 들러리일 뿐이었나 보다.


좌측 국립역사박물관. 우측 카잔 성당


붉은광장을 따라 길게 뻗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굼' 백화점(1893년). '풍요한 상점'의 자격으로 소련 경제의 상징적 쇼윈도였다. 그리고, 크렘린 궁 그리고 그 앞의 국부 레닌의 방부 처리된 시신이 안치된 영묘와 마주하였다. 어울리지 않는 동행처럼 보였다.

 

붉은광장 좌측의 굼 백화점. 크렘린 궁 성벽과 레닌 영묘


10년 전의 굼 백화점 기억이 새로웠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와 무척 닮은 꼴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날의 외경스럽던 서유럽 명품 브랜드 매장들은 동맹이라도 한 듯 휴점 상태였다. 사람이라도 많았다면 쓸쓸함이 덜 했을까.


좌측 큰 사진은 영화롭던 시절의 굼 백화점. 우측 사진 두 개는 이번 여행 중의 일요일 풍경  


고고한 겨울왕국의 트로피컬 가든은 깨진 유리창으로 밀려드는 찬바람을 막아낼 힘이 없어 보였다. 더 머물 이유가 없었다. 레닌 묘가 바로 보이는 허리춤에서 빠져나와 바라보는 9월의 모스크바 하늘은 쉴 새 없이 몰려다니는 구름으로 인해 어두웠다 밝았다를 짧은 주기로 반복하고 있었다.


크렘린 궁(1156년) 투어를 하지 못했다. 성모승천 성당을 들어가 볼 수 있는 희박한 기회를 놓쳤다. 그래도, 모스크바 강 건너 크렘린 궁 성벽 위로 빼꼼히 올라온 하얀색 성당의 황금빛 돔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였다. 봉헌할 선한 마음이 없는 내게는 그게 더 신비한 경험이라 말하는 게 더 사실적이겠다.



붉은광장.


러시아어로 '붉은'이란 단어는 광장이 조성된 14세기에는 '아름다운'이란 뜻이었단다, 우리말에서 '벼뮈'(작은 그 무엇)이 '별'이 된 것처럼. 아름다운 광장은 폭동의 현장, 처형의 현장, 다시, 정치의 현장, 군사 퍼레이드의 장소로 변해왔다. 통치자의 폭압적 군림의 상징이 되었다.


아, 드디어, 성 바실리 성당.


광장의 끝으로, 맑지 못한 날씨라서 더 쓸쓸해 보이는, 비현실적이고 동화 같은 모습의 성 바실리 대성당을 마주하였다. 세월은 덧없이 흘렀어도, 모스크바의 많은 것이 변했어도, 그 아름다움만큼은 변치 않았다. 



16세기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4세는 러시아에서 카잔 칸을 몰아내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1561년 이 성당을 완공하여 봉헌하였다. 하지만,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이 성당에 반해 영국에도 이런 성당을 짓도록 건축가를 보내달라고 하자 이반 4세가 아니꼽게 여기고는 건축가의 눈알을 뽑아버렸다. (물론 사실이 아니라는 게 중론이다.)



모스크바를 밝히는 쓸쓸한 수은 가로등


나의 러시안 감성에 대한 노스탤지어는 꽤나 길었는데, 정작 만남은 너무도 짧았다. 


바실리 성당은 길고 긴 세월을 한결같이 애수에 젖은 영욕의 붉은광장을 비추고 있었다또 한 번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모스크바의 쓸쓸한 도시 풍경 속에 조그만 빛을 내는 수은 가로등과 같은 애수의 감성이 성큼 다가섰다.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 러시아 역사상 가장 뛰어난 통치자는 1698년 반역을 꾀하였다며 자신의 근위대(Streltsy) 병사 1,182 명의 목을 베었다. 바실리 성당은 목전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나긴 세월을 견뎌오며 바실리 성당이 바라본 것이 어디 그것뿐이었겠는가. 


"겨울이 오면 봄은 멀지 않으리."


러시안 감성은 붉은광장을 비추는 바실리 성당과 같음을 알았다. 


경쾌한 듯 서글픈 듯...


The Morning of the Streltsy Execution (근위대 처형의 아침) 바실리 수리코프 (1881) (좌측)


어느 정치 평론가가 말했다, 푸틴의 독재 체제가 가능한 근저에는 '혼란'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공포와 옛 소련이 누린 영화에 대한 갈망이 깔려있다고.




푸른 실안개(Blue Haze)


붉은광장과 바실리 성당에서 한걸음 한걸음 멀어질 때마다 짙은 아쉬움이 아스팔트 위로, 보도블록 위로 뚝뚝 떨어지고 있음을 알았다. 


어느새 모스크바 강이 가까이 보이는 자르예드예(Zaryadye) 공원 언덕 위에 올라서 있었다. 때마침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선율. 모던한 러시안 감성. 행여 음악이 끊길까 서둘러 샤잠(Shazam) 앱을 켰더니, 몰도바 작곡가 오이겐 도가(Eugen Doga)의 Blue Haze였다. 


모스크바 강 윤슬 위로 평화의 선율이 흘러 퍼졌다. 과연 이곳이 전쟁 중인 나라가 맞을까 싶은 슬픈 짜증이 밀려왔다.




전쟁터에 보내질 젊은이들


9월 하순을 향하던 어느 날, 푸틴 대통령이 '극동이 깨어날 때'라는 연설을 통해 부분 동원령을 선포하였다. 자칫하다간 러시아를 빠져나오기 힘들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다행히 브누코보 공항은 우려만큼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천만다행이었다.


다시, 터키항공 비행기에 몸을 싣고는 모스크바와 기약 없는 이별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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