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루밍드림 May 26. 2024

애수에 젖은 모스크바, 그리고 수은 가로등 ①

세계여행 에세이: 러시아 모스크바 (1화)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을 출발한 터키항공 비행기가 모스크바 브누코보 공항에 착륙하였다. 처음 와보는 공항이었다. 편치 않았던 긴 비행으로 인한 피로감과 약간의 긴장감이 일시에 몰려와 짜증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시작한 그해 9월 중순의 어느 날이었다. 전쟁의 여파로 현지 사업에 이런저런 문제들이 생겨났다. 그렇게, 10여 년 만에 모스크바 땅을 다시 밟았다.


유럽을 오가는 항공노선은 죄다 러시아를 비켜가느라 한참을 두르는 판국에 나는 그 나라 심장부로 깊숙이 들어와 버렸다.   




변해야 하는 것과 변치 말아야 하는 것 사이(間)


강산도 한 번은 바뀔 긴 세월 동안에도 푸틴은 변함이 없었다.


코카콜라든 펩시든 콜라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래도, 달라면, 카자흐스탄 콜라를 가져다주었다. 노란 잉카콜라를 처음 마실 때 보다도 더 꺼림칙했다.


민대가리 스킨헤드들이 사라졌다. 선량한 유학생들이 그놈들 손에 죽임을 당했었다. 붉은 광장에서 그렇게 생긴 놈들이 내게로 다가와 혼비백산했었다. 사람들이 푸틴의 치덕이라고 칭송했다. 그래도(그래서), 지금은 혼자서 거리를 활보하고 지하철까지 탈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음식은 우리 재료를 써야 맛이 납네다. 지금은 조국에서 재료가 오지를 못합네다." 북한식당 여종업원의 말이었다. 고급 레스토랑들은 성업 중이었다. 퓨전 한국음식 레스토랑은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자리 잡기도 힘들었다.


변한 것은 멀지 않은 곳에 널려 있었다.



외로운 밤 수은 가로등 같은 감성


푸틴은 말고, 변치 않은 게 더 있다면, 그건 애수(哀愁)의 러시안 감성에 대한 나의 노스탤지어 같은 연모라고 말하겠다. 그 뿌리는 예전부터 알지 못했다.


유튜브로 피아니스트 임윤찬 군이 반 클라이번 콩쿠르 결선에서 격정적으로 연주하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들을(볼) 때마다,

무심코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선율을 흥얼거릴 때에도,

무소륵스키의 '민둥산의 하룻밤' CD를 틀어놓고 거실 소파에 드러누웠을 때에도...

외로운 밤길을 말없이 비추고 서 있는 수은 가로등 같은 감성이 노곤한 심장을 뚫고 들어오려 했다. 그리고는, 어느새 격정의 감정으로 변해가곤 했다.


모스크바행 지루한 비행 중에도, 호텔을 향해 달리는 밴의 차창 너머로 늦은 오후의 모스크바 시내 풍경을 바라볼 때에도, 붉은 광장에 붉은군대합창단이 도열하여 경쾌한 듯 서글픈 듯 '카츄샤'(Katyusha)를 노래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세상 뒤숭숭할 때 모스크바 땅을 밟은 고단한 나 자신에 대한 웰컴 기프트 같았다.


(2016년 12월 시리아로 공연을 가는 붉은군대합창단원들을 태운 러시아 군용기가 추락했다. 단원 64명 전원이 사망했다.)




으스스한 추위에 몸을 떨다



9월의 모스크바는 이미 겨울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침에 지하철 역에서 우르르 몰려나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두꺼운 겨울 외투를 입고 있었다. 생긴 것을 보기 전에 옷차림만 봐도 나는 이방인이었다.


호텔 방이 냉골인 것은 죽을 맛이었다. 9월 마지막 날인가 10월 초인가 되어야 난방용 가스가 공급되기 시작한다고 했다. 소형 전기난로 하나 얻어 끌어안다시피 해도 추위를 달래주지는 못했다.


길 위에서 울고 있는 젊은 남자를 보았다. 그의 곁에서 마침 거리를 청소하고 있었던 듯한 다른 남자가 위로를 해 주고 있는 듯이 보였다. 지인에게 들었다. 그곳에 병무청 같은 기관이 있으며, 아마도 전쟁에 징집된 젊은이일 거라고 했다.


모스크바는 준비가 덜 된 이방인에게 참으로 추운 도시였다.


은행보다는 환율이 유리하다고 해서 호텔 바로 인근의 벨로루스키 역(벨라루스행 기차가 주로 발착한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가졌다.) 환전소까지 찾아갔다. 환전소에 들어서자마자 육중한 출입문이 덜커덩 잠겨버렸다. 괜한 사소한 욕심에 편치 못한 기분을 얻었다.


도심(Tverskoy District)에 위치한 호텔 앞 대로는 이른 저녁 시간인데도,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고, 딱딱하고 칙칙한 도시의 빛깔만 남았다. 강렬하게 퍼지는 가로등 불빛이 외면받는 이 도시의 풍경을 더욱더 을씨년스럽도록 거들었다.



그럼에도, 러시안 감성은 여전히 내 몸속에 살아있었다.



여행자 느낌으로 찾아보는 사람 사는 이야기


모스크바 일상 풍경만 보아서는 이 나라가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가끔씩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래도, 왠지 지하철 타기는 꺼림칙했지만, 북한식당 '고려'를 가기 위해서는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었다.


중후한 클래식함이 인상적인 모스크바 지하철 플랫폼으로 둔탁하게 생긴 열차가 빠른 속도로 들어오더니 "끼긱, 쿵" 급정거 소리를 내며 덜커덩 정차를 했다. 터프했다. 붉은군대합창단 영상에서 자주 본 러시아 군인의 경직된 모습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반면에, 레트로 감성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열차 안 풍경과 약간은 촌스러운 듯한 젊은이의 옷차림새를 목격하고는 긴장이 조금씩 풀려갔다.



다녀본 북한식당들은 저마다 특징적인 메뉴나 손님 응대 방식을 갖고 있었다. 모스크바는 쟁반냉면이 특이했고, 종업원들도 크게는 쌀쌀맞지 않았다. 모니터에 보천보 전자악단이 나오길래, 보천보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특별할 게 없는 대화가 오갔다.


"(김일성) 장군님께서 1937년도에 함경도 보천보에서 일본 놈들과 싸워 크게 승리하신 곳입네다. 학교에서 안배우셨습네까?"


또다시 지하철을 탔다. 이번엔 파르티잔스카야 역에서 내렸다. 10분 정도 걸어서 롯데월드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즈마일로보 크렘린(Izmailovo Kremlin)을 만났다. (크렘린은 '성채' 그런 뜻의 보통명사다.)


난 처음부터 '본뜰 모(模)'로 시작하는 한자 단어를 좋아하지 않았다. 모조, 모형, 모호... 보면 그냥 답답해질 때가 많았다. '내 편'이면 거짓도 사실인양받아주고, '네 편'이다 싶으면 사실도 거짓으로 매도하거나 외면해 버리는 요즘 사람 사는 형편이 싫어서 그럴 수도 있었다.


관광객 유치를 위해 2001년인가 모스크바 시가 작심하고 개발했단다. 러시아 특징을 살리기 위해 수세기 전의 스케치를 본떠서 건물을 세워 올리고, 수공예가, 화가, 도예가, 골동품 업자들을 모으고, 또 예쁜 목조 정교회 성당까지 세워놓았다.

 


혐오하던 모조 건축물 성당 안에 발을 내딛자 오후 한때의 평심을 얻는 아이러니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이곳 전체가 진심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을 보며,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매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기념품점 몇 곳을 들렀다가 베르니사쥬 쪽으로 가 보았다. 주말이라 북적일 거라는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시쳇말로 상권이 죽었다.


골동품점, 모피가게, 마트료시카(인형 몸속에 더 작은 인형이 몇 개씩 들어 있는 러시아 전통 인형)와 조스토보 쟁반(철을 녹여 해머로 두드려 쟁반을 만들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려 넣는 조스토보 마을 특산품)을 파는 노점상들을 지나쳐갔다. 한가해 보이는 노점상인과 재미 삼아 흥정하다가 덜컥 쟁반 작은 것 하나를 사버렸다. 예전에 가끔 보던 집 인테리어 고쳐주는 캐나다 TV 방송에서 "농구공 보다 작은 소품은 죄다 갖다 버려라."라고 했던 말이 즉각 떠올랐다.


시장 뒤로는 유럽에서 제일 크다는 벼룩시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나라 저 나라 벼룩시장을 여럿 둘러보다 보니 나름 안목이 생겼다. 온갖 '잡다한' 물건들을 내다 파는 사람들로 꽉 차 있는 풍경을 보며, 꿈에 부풀었던 러시아의 어제에 대비되는 고단한 오늘의 민낯을 보는 듯했다. 발길을 돌렸다.    



출출한 배를 채울 곳으로 꼬치구이 집 밖에 찾지 못했다. 한산한데도 그늘진 근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밝은 얼굴로 꼬치를 구우며 느닷없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왔다. 노력하는 듯한 한국말 보다 그런 표정과 행동이 더 기분 좋은 법이란 것을 그 사람들은 알고나 있을지 궁금하였다.


이게 다 전쟁의 영향을 받는 변화된 일상일 텐데도 내가 만난 낯선 이들은 어느 누구도 전쟁에 얽힌 불만을 말하지 않았다. 지인 중에는 내게 "우크라이나인들이 은혜를 모르고 덤벼든 까닭이다."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고, "징집을 해도 시베리아 촌구석 애들을 먼저 데려간다."라고 시건방진 말을 하는 이도 있었다.


소통의 차이일까, 인식의 본질적 차이일까 약간은 혼란스러웠다. 변화시키려는 힘과 변하지 않으려는 힘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살아갈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추위로 몸이 상했는지 턱이 덜덜 떨리고 기침을 계속 해댔다. 그래도, 내일은 붉은 광장과 성 바실리 성당과 같은 러시안 감성의 고향과 같은 상징들을 찾아가 보리라 다짐하였다.


(모스크바 이야기가 다음 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이전 07화 환생 아니면 갱생, 어떤 바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