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브래스카의 괴팍한 늙은이

노후 준비가 안되었습니다.

by 블루밍드림

하얀 블라인드를 길게 내린 거실 창 밖으로 장대 같은 검은 소낙비가 꽤나 북적거렸다. 아이들 엄마 손에 책 한 권이 들렸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관심 없는 척, 슬쩍 훔쳐본 책의 제목이 역시나 예사롭지 않았다. '노후자금이 없습니다'* 몇 십분 뒤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한바탕 집요한 설교를 들어야 할 게 불 보듯 뻔하였다.


"어차피 화장할 건데 관은 왜 그렇게 비싼 걸로 고르려는 거지?"

"우리는 절대로 연명치료 안 할 거지?"


30 센티미터쯤 떨어져 앉았다.


굳게 닫힌 내 눈꺼풀 속에선 뼈만 남아 앙상한 시 한 편이, 현실감 결여된 공허한 설교를 BGM 삼아, 몸을 베베 꼬아대기 시작하였다. 여러 날이 지나도록 당최 잊히질 않는 징한 놈이었고,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었다.




네브래스카주의 노스플랫 요양원 창가로 병상 하나가 비어졌다. 변변한 유품이랄 게 있을 리 만무하였다. 고인의 소지품을 수습하다 꼬깃꼬깃 접힌 종이 위로 아마도 두 손으로 써 내려간 듯한 흐트러진 글씨체의 시 한 편을 발견하였다. '괴팍한 늙은이'**라는 요상한 제목을 달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도 쓰레기통에 던져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봐요 보호사 양반, 대체 뭘 보는 거요?

날 바라볼 때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요?

습관마저 흔들린 채 먼 곳으로 흐려지는 눈빛,

아둔하다 못해 괴팍한 늙은이, 뭐 그런 거요?


음식은 입 밖으로 흐르고, "한번 해 보란 말이에요!" 소리쳐도

대답조차 모르는 늙은이,

당신이 무얼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늙은이,

양말을 어디다 뒀는지, 신발은 또 어디다 벗어뒀는지도 모르는, 고작 그런 것만 반복하는, 늙은이


씻기고 먹이면 또 긴 하루를 살고,

싫든 말든 당신네 뜻대로 사는,

늙은이, 그게 난가요? 그렇게 보이나요?

눈을 떠봐요, 그건 분명 내가 아닐 거요.


난 말이요, 먹이면 먹고, 꼼짝없이 앉아만 있어도,

난 말이요.. 열 살 소년이라오.

아버지도 있고, 어머니도 있고, 형제들도

날 사랑한다오.


내 나이 열여섯, 내 발에는 날개가 달렸소.

스무 살 즈음엔 사랑스런 남편도 될 거라오.

아, 가슴 뛰는 일이잖소? 꼭 지키리라던 그 서약을

내 어찌 잊을 수가 있겠소.


스물 다섯 내 품에서 아이가 자라고,

내 가슴으로 가족을 품어 산다오.

이제 서른 살, 아이들은 쑥쑥 자라고,

영원히 풀리지 않을 인연으로 우리를 묶었소.


내 나이 마흔, 아이들은 다 자라 내 곁을 떠났고,

아내가 있어 내 울지는 않았소.

쉰이 되니, 또다시, 내 무릎 위로 아이들이 뛰놀고,

그 옛날처럼, 사랑으로 품었다오.


어두운 날들이 닥쳐 아내가 죽었소.

내일의 날들이 두려웠다오.

아이들은 모두 자기 아이들을 품었고,

난 지나버린 날들과 떠나버린 사랑을 그리워하였소.


난 이제 늙었고,

세상은 늙은이를 바보로 만드는 가혹한 농담이라오.

내 몸의 우아함과 강인함은 산산이 부서졌고,

심장이 뛰던 자리엔 차디찬 돌덩이가 들어앉았소.


그런데 말이오, 시체 같은 몸뚱이 속에 아직도 젊은이가 살아있다오.

그래서 가끔씩 내 멍든 가슴도 부풀어 오른다오.

기쁨을 기억하고......... 고통을 기억하고,

또다시 내 삶을 사랑하고, 살아가고


너무나 짧았던, 너무나 빨랐던 날들.

이 세상에 영원한 게 어딨겠소.

이제 그만 눈을 떠보오, 그리고 바라보오...

괴팍한 늙은이, 내 가까이, 아직도 그렇게만 보이오?


이다음에 또 어떤 짜증 나는 늙은이를 보걸랑 이 시를 기억해 주오. 그리고, 부디 젊은 영혼을 바라봐 주구려...




바깥 창엔 쉴 새 없이 소낙비가 부딪혔다. 꽤나 난리스러운 밤이었다.


"은퇴하면 텃밭 하나 사서 가꿀까? 나중에 죽으면 납골당 말고 거기다 뿌려달라면 되잖아."


"한참 남은 일을 왜 자꾸 얘기하냐고! 나중에, 나중에.."


30 센티미터를 더 벌여 앉았다.


"미리미리 생각해 두자는 거지."


드세게 들리는 빗소리가 마치 새로운 BGM 같았다. 네브래스카를 떠나, 미주리로 갔다가 콜로라도로 갔다가.., 이제 멀고 먼 내게까지 날아온 어느 괴팍한 노인네의 시 한 편이 내 눈꺼풀 속에 깊이 처박혔다. 입 안이 텁텁하였다.


"내일 아침에 비 그치면 서촌에나 갈까? 달달한 빵 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좀 사 먹자."


열의에 찬 노후 준비 설교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엉뚱한 대꾸를 하였다. 소파에서 일어서다 보니, 다른 한쪽에 검은 표지의 두꺼운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조만간 또 다른 설교가 이어질 게 분명하였다. 아, '세이노의 가르침'이라니..




*가키야 미우의 '노후자금이 없습니다'

**미국 로터리클럽에 소개된 'Crabby Old Man'이라는 작자미상의 시와 그 시에 얽힌 사연을 재해석하여 번역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