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들레르와 어떤 위안
주말 오후가 무척 무료하였다. 창을 뚫고 침입한 햇살이 소파까지 뻗쳐오길래, 더는 이기지 못하고 TV를 켰다.
"마음은 수천 개 TV 채널과 같다. 선택하는 채널대로 그 순간은 나로 존재한다. 기쁨의 채널을 선택하면 스스로 기쁨이 된다."
소파에 드러누워 이리저리 채널을 돌렸다. 의식이 점차 희미해져 갔다.
"어쩌다 운이 좋아서... 직업을 가지게 되었고, 특별히 잘하는 기술을 습득하였고, 그래서, 더 잘하는 '척'했다."
거기까지는 나도, 그 남자도, 또 다른 누구여도 아주 특별할 것까진 없다 싶었다. 혼잣말로는 "억세게 운이 없다."라고 칭얼대기 일쑤지만, 솔직히 이런 나를 두고 "재수 없어!"라고 욕할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싶은 경계심 마저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 남자는 (주말 오후의 무료함을 달래려 틀어 본)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나왔었다. 느릿한, 어쩌면 어리숙해 보이는 모습을 줄곧 시전 하더니, 특히 잘한다는 '조림' 기술로 고비 때마다 연쇄적 승리를 쟁취하였다. 사실 거기까지도 '뻔'한 성공 드라마였다.
최종 승부 '나를 위한 요리' - 호박잎, 성게알, 대파,,.. 깨두부까지. 자기가 좋아하는 식재료 몇 가지를 넣어 만든 국물요리와 '빨간 뚜껑' 소주 한 병.
나를 위한 것이니만큼, '척' 하기 싫었다는 그 남자. 하루의 끝 - 고독한 주방, 허탈한 고단함 - 안쓰러운 자기 위안의 서사는 '조림'이 아니었다.
그 남자의 우승에 연민의 화관이 씌워졌다. 나도 그 남자가 무척 안쓰러웠다. 그 남자와 내가 엇갈린 대목이 바로 거기였다. 나였으면, 너무도 당연하게 한껏 끌어올린 '척'을 내밀지 않았을까.
그 밤, 술 한잔 들이켠 김에 가만히 따져보았다. 오후의 연민이 가시로 돋아났다. 그건 애초에 너무 불공평한 '안쓰러움'이었다. 요리로 밥 먹고 사는 특출 난 요리사가 (정직한) 요리로 자신을 위로하였다면, 나는 무엇이 특출 나서 여태껏 밥 먹고 살았을까. 내가 잘하는 기술의 어떤 변주가 정직하여 고단한 나를 위로해 줄까. 난 남의 잘못을 들춰내는 일로 하루를 벌어먹고 살거늘.
빨간 뚜껑 소주만이 공평한가.. 주말은 끝나가고, 나도 어둠도 참 안쓰러웠다.
겨울이 깊어서일까. 성탄이 지난 지 오래 건 만, 도시의 불빛이 모공마다 스며들어 숨 가쁘게 반짝거렸다. 퇴근길이 무척 고단하였다. 집으로 향하는 궤도를 벗어나, 목적도 없이, 가까운 카페의 문을 열었다.
아메리카노 한잔을 놓고 창가에 앉았다. 간질이는 음악 선율이 커피 잔이 내뿜는 김을 타고 올라 코끝에 닿았다. 잘 짜인 뮤지컬 무대 장치 같은 카페 풍경 바깥으로 사람들이 유령처럼 흘러갔다. 그제야 - 나를 위해 준비한 보통의 위안 속에 고단함을 잠시 묻어두었다.
시간의 속도가 점점 흐릿해진다 싶더니,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섬뜩하였다.
'뭐야, 나 아냐? 저 표정은 또 뭐야. 너무 어색하잖아. 정말 나야?'
겨울 저녁 카페 창은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추었다. 나를 들여다보는 내 눈동자를 바라볼 때에, 조명은 힘들고, 나는 그저 내가 안쓰러울 뿐이었다.
유리창 위에 포개진 두 개의 눈빛. 하나는 연민을 허락하고, 다른 하나는 밀어냈다. (나를 위한) 국물요리와 빨간 뚜껑의 소주가 확 당겼다. 그 순간, 유리창 위로 '가난한 자의 눈(Les Yeux des Pauvres)' - 보들레르 시의 환상이 프롬프터처럼 빠르게 스쳐갔다.
눈이 멀만큼 화려한 카페에 앉았다.
우리 둘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웠다.
그때, 창 너머로 여섯 눈빛이 섬뜩했다.
'아름다워'
'우리는 못 들어가'
나,
- 연민을 관찰하는 슬프도록 영악한 영혼,
그 눈빛에서 안쓰러움을 읽었다.
그녀,
- 가스등 불빛에 영감을 받았다.
"저 눈빛 너무 보기 싫어요. 제발 쫓아버려요."
"아무리 사랑을 속삭여도,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고, 결코 같은 마음이 될 수 없다. 사실은 각자의 고립된 섬에 살고 있다." 그렇게 헤어질 결심을 하는 보들레르가 참으로 안쓰러웠다.
카페 안의 나. 창밖의 나. 아마도 그 둘 다. 보들레르의 헤어질 결심을 빼닮았다. 마주 보면서도 결코 섞일 수 없는 유리창 양면의 존재들이었다.
도시는 밤을 향해 계속 흐르고, 인공 불빛에 젖어갈수록 더욱 아름다웠다. 그게 마치 위로인 척했지만, 어쩌면 오늘을 별 탈 없이 견뎌냈다는 안도 위에 덧씌운 데코레이션에 가까웠다. 이제 그만 일어서야지.. 식은 커피 잔 속으로 묻어두었던 고단함 한 방울이 톡 떨어져, 진하고도 쌉싸름한 마지막 한 모금의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집으로 향하는 그 길 위에서, 안쓰러움은 나를 위로하지 않았고, 다만 나를 끝까지 혼자 남겨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