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프트 블루

모든 지금은 결국 그리움이다

by 블루밍드림

델프트의 시간 속에서, 아름다움이 세상을 걷는다.


이런 것들 - 시(詩)가 이미 여러 번 우려먹은 것들. 두텁고 축축한 적란운과 낮은 하늘, 그 틈새로 은은하게 걸리진 빛, 시청 광장 신(新)교회의 높다란 종탑, 붉은 벽돌과 제각각 박공지붕들, 육중한 고딕 양식의 구(舊)교회와 삐딱하게 기울어진 벽돌 종탑, 결코 깨끗하다 하지 못할 묵직한 일직선의 까날(운하)과 그 곁의 자전거들, 열주처럼 늘어선 푸른 나뭇잎들까지.


델프트 시청 광장과 신교회 종탑


5월의 끝자락, 토요일의 정오가 델프트의 '이런 것들'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예상했던 그대로의 '델프트 풍경'이었다.


개혁교회로 변심한 옛 가톨릭 성당을 끼고돌자, 까날을 따라 따닥따닥 붙어서는 잡동사니를 부려놓은 벼룩시장이 펼쳐졌다.


델프트 까날 벼룩시장


저마다의 오래된 시간들이 좌판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델프트 블루* 접시와 찻잔과 꽃병, 푸르거나 붉거나 까날 주택 미니어처, 어느 집 거실에서 떼온 듯한 빛바랜 그림. 쓸모를 다한 듯 보여도 누군가에겐 새로운 이야기가 될 잡동사니들..


"접시 이거 얼마예요?"

"20유로. 진짜 잘 그린 거예요. 자세히 봐봐요."



"에이, 이거랑 똑같은 거 10유로 줬는데요."

"15유로"


사 모으고, 내다 팔고, 그래도 아직 우리 집 벽에 걸려 있는 푸른 접시들 - PVC 타포린 천막 위로 널브러진 것들은 낯익은 그리움이었기에, 산만하게 가격을 묻고 별 뜻 없이 흥정의 눈을 맞추었다.



나뭇잎의 푸른빛과 까날의 열주를 따라 걸었다. 나는 걸어 다니며 웃지만, 여러 번 우려먹은 '이런 것들' 속에 갇혀버렸다. 길바닥의 쐐기돌에서 푸른색 잉크가 배어 나왔다. 아련한 옛 기억의 색도 그러했다. 델프트는 온통 시린 '블루'로 물들고 있었다.


여러 해가 흘렀어도 아직도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더치(Dutch) 말 한 문장을 시로 적었다.

"Ik ben verliefd op jou."

이크 벤 펄리프트 옵 야우

"내가 당신으로 물들고 있어요."


나는 그저 내가 적은 시(詩)고, 내가 좋아하는 그 시 속을 몇 시간이고 걷고 또 걸었다.




모든 지금은 결국 그리움이다.


걷다 보니, 여태 시로 쓰인 적 없는 풍경 속을 걷고 있었다. 개혁교회의 종탑도, 까날도, 모두 일직선이지만, 시간은 그렇지 않아서 겹쳐지고 되감기고 - 완전히 되돌아갈 수 없는 기억에 대한 그리움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빠 네덜란드에 출장 왔어. 지금 델프트야."


분명 '지금'을 전하려 했지만, 입술을 떠난 '지금'은 공기 속에서 휘발되어 무서운 속도로 과거가 되어 버렸다. 목소리가 닿는 순간, 우리는 함께 걷던 그날의 까날길로 소환되었다.


"여기 아직 기억나지?"


아이들의 그림자가 다리 난간에 부딪힐 때, 오래전 숨겨둔 웃음소리를 찾으려 경도놀이를 하듯이 헤매었다. 기억과 현재가 경계 없이 섞여버린 그날이 델프트 블루 푸른 잉크처럼 내 마음에 번져 있었다.


그새 익숙해진 풍경과 다시는 되돌아가지 못할 기억 사이의 빈 공간이 5월의 끝자락인데도 나름대로 차가웠다.




옛날 일기를 다시 꺼내 읽었다.


맑은 햇살이 눈부셔 집을 나선다.

언제 이런 날이 다시 올까 - 하늘에 감사하며 델프트로 향한다.

지난 몇 주 심하게 다친 내 마음이나 달래 보련다.



하늘, 물, 집,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람들.

우리 다 함께 베르메르의 '델프트 풍경'이 된다.


우리 집 악동들도

이곳이, 이 순간이 마냥 좋기만 하다.



우연히 발견한 레고 가게에서

"나 저거 살래."

"나도. 나도."

예정에 없던 특별 선물을 산다.

녀석들, 어찌 행복해하지 않으랴.



델프트 블루 하나 싸게 사볼까 기웃거린다.

베르메르의 '우유 따르는 하녀'를 집어 든다.


이다음 햇빛 좋은 날에는

베르메르의 '델프트 풍경'을 보러

헤이그로 가리라.


나들이가 끝이 난다.

기억은 늘 현재보다 느리게 흐르는 법이니,

저 아이들도 오늘 기억으로 나처럼 행복했으면 좋겠다.



*델프트 블루: 흰색 바탕에 푸른색으로 그림이나 문양을 그려 넣은 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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